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누 Dec 13. 2022

#07. 흥분을 가라앉히는 방법을 찾아서

유나가 비누, 재하에게 | 그리고 비누와 재하로부터

#7. 흥분을 가라앉히는 방법을 찾아서

안녕 재하 비누

오늘은 뜬금없이 빙빙이*와 나의 공통점을 이야기해볼까 해(자랑 아님 주의!)


내가 집 도착해서 도어록을 누르면

빙빙이가 자박자박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거든?

그게 소리만으로도 너무 귀엽고 설레니까

심장 부여잡고 문을 여는데... 막상 빙빙이는 기지개나 켜고 있어.


‘참나ㅡㅡ 얼굴 보자마자 지루해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볼 때마다 이런 기분이었는데-


얼마 전에 유튜브를 보니까

고양이들은 너무 좋으면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기지개를 켠다는 거야! 정말 앙큼하지?


근데 고양이 습성에서 친숙함이 느껴져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 더라고?

(물론 나는 앙큼하지도, 귀엽지도 않습니다^^;)


난 너무 즐겁고 신나면, 갑자기 내 안에 빨간 모자를 쓴 조교를 불러. 그리고 열중 쉬엇! 외치거든.

그리고는 '내가 혹시 누구한테 상처 주는 말을 하진 않았나?' '정신을 이만큼 놓아도 되는 걸까?'... 등등 놓쳐버린 것, 놓아 버린 것들을 점검하기 시작해.


화가 나서 분노할 때도 마찬가지야.

대뜸 마음속에 불을 끄고 초를 켜, 그리고 불 끝만 봐.

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내가 기름을 부은 건지 하나 둘 추적해 나가.


이렇게 흥분들을 가라앉히는 순간은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사실 후회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


즐거울 걸!!! 더더 더 머리채 풀고 놀 걸!!!

재미는 그때뿐인데!!!

억울해 죽겠네!!! 내가 더 화내 줬어야 했는데!!!

뒤늦게 가슴 치면 그건 뒷북이지!!


그래서 적당히 흥분을 가라앉히면 좋겠는데

가라앉힘의 적정 정도와 방법을 못 찾겠어.


왠지 비누는 비누만의 흥분 적정량이

재하는 재하만의 흥분 조절 방법이 있을 거 같아.


고양이들처럼 햇볕 아래 모여서

같이 엉덩이 붙이고 온기를 나누는 기분으로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


각자의 흥분 이야기를 기다릴게


- 빙빙이 동거인, 유나가

2022. 11. 21. 오후 10:04


*유나와 동거 중인 고양이

좋은 건 나눠 보라고 배웠습니다. 빙빙이 사랑한다. (배방구 뿌루루루루루루) 비누가..




Re: 흥분의 실험

언니 안녕?

나는 지금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이야.

제주에 있는 동안 날이 참 좋았는데

저녁부터 호우주의보가 발령되더니

지금 이 작은 비행기는 몹시 흔들리고 있어.

이럴 땐 갑자기 무섭기도 하고

생각이 많아져 언니한테 답장을 써.


요즈음 내 고민은 말이야.

감정이 너무 무르다는 거야.

적정한 흥분에 대해 물었지?

나는 최근에 너무 작은 일에도 슬퍼하고 눈물이 나서

조금은 눈물이 없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어릴 때 나를 참아 주었던 이모나 삼촌을 생각해도

문득 김윤아 앨범을 듣다가도

친구가 가벼운 마음으로 적어 준 엽서를 읽다가도

자꾸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참을 수가 없어.

너무 많이 우는 것도 병일 수 있을까?  


다시 흥분 이야기로 돌아오면

어떤 상황을 마주할 때 그걸 대하는 방식은

그 사람을 보여 준다고 생각해.

언니가 빙빙이처럼 즐거운 일 앞에서도 기지개를 켜고

화가 나는 일 앞에서도 한번 멈춰서는 것은

살면서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나는 자주...... 너무 흥분하거나 과하게 화를 내서

언제나 적당과는 거리가 멀어서

이튿날 거듭 후회했어.


한동안은 마음을 줄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

덜 기뻐하거나 말을 아끼거나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방식으로.

효과가 없었던 건 아닌데 그냥 오래가지는 못했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기쁘고 즐거울 때는 최상급의 수식어를 모조리 붙여 칭송하거나 추앙하고

슬프고 화가 날 때는 바다처럼 잠기고 불처럼 날뛰는 게 나니까.

시간이 흐르고 나서 깨달았던 건

흥분 앞에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보다도

흥분을 대하는 나를 타인이 어떻게 여겨 주느냐가 더 내겐 더 중요했다는 사실이야.


후회스러울 정도로 바보 같은 말을 했더라도

상대가 그것만으로 나를 재단하지 않으면,

오히려 좀 바보 같아서 좋다고 해 주면,

그저 함께 즐거웠다는 감상이 전부라면,

조금 흥분해도 괜찮더라고.

그 아슬아슬한 선을 잘 찾아야겠지만 말이야.


얼마 전 친구에게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내다가

혼자 운 게 바보 같고 웃겨서

나이 들었는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난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더니

친구는 비웃는 대신 이렇게 말해 주었어.

"그만큼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게 많아진 거겠지."

나이가 든다는 게 이해하고 슬퍼하고 기뻐할 일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깊고 넓게 감각하게 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나이 들어주려고 해.


언니도 언니가 원하는 대로 흥분을 감각하도록 실험해 봐.

언니가 빙빙이처럼 하품을 하든,

폭주기관차처럼 달려가든,

언니의 이야기 앞에서 함께 흥분할 생각이 나를 벌써 흥분하게 해.


이제 착륙하려나 봐.

비가 그치면 추워진다더라.

따뜻한 술이라도 마시면서 올해를 잘 닫아 보자.

이번 만남에는 어떻게 흥분해 볼 거야?

기대하고 있을게.


사랑을 담아,

비누


추신.

사실 우리 만날 때 언니 늘 흥분했던 것 같은데 아니었나?

2022. 11. 30. 오후 7:08



Re: 굳은살을 믿고

유나 안녕.

날이 정말 춥다. 요즘 바이크를 타는 내내 구원을 바라. 저 좀 살려줍쇼.

옷 안에 갇히는 느낌이 싫어서 여태껏 롱 패딩을 거부해왔는데.

요 며칠 침낭을 입고 다니고 싶단 생각을 떨쳐낼 수 없네.

그나저나 침낭을 입고 다니고 싶단 생각이 롱 패딩 개발의 시발점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네?


유나야

흥분과 분노 앞 기지개를 켜는 너의 모습들은

내가 잘 알고 있는,

그리고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유나의 모습이기에

메일을 읽어 내려가며

머릿속 잠들어있던 그 순간순간들이 깨어나 다시 움직이는 듯했어.

그런데 그 기척에 정반대의 순간들도 잠에서 같이 깨어났어.

유나가 날 것 그대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흥분하고

(내 일에) 불같이 화를 내던(생각해 보면 네가 네 일에 그런 적은 없다 유나야.. 나 또 눈물 고이네... 계집애..)

더!!! 더!!!! 더!!!!! 의 순간들 말야.

그런 너의 모습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쁘고 벅차.

“아 너무 행복해!” 와 “아 너무 슬퍼..”를 한자리의 분 단위로 외쳐대는

나 같은 인간의 흥분 순간은 한겨울의 검정 롱 패딩만큼 희소성이 떨어지지만.

유나의 순도 99.9%의 흥분을 함께한다는 건

한 겨울 침낭을 입고 깽깽 발로 뛰어다니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과 같은 특별한 일 아니겠어?


사실 나는 네가

기지개를 켜는 모습도,

기지개를 너무 깊게 켜다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는 모습도,

기지개를 잘 못 켜서 담에 걸리는 모습(?)도,

그리고 기지개를 켜는 걸 잊고 춤을 추고 흥분에 뛰어 뜨는 모습도

모두 다 좋아하지만

네가 되고 너를 함께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서

흥분을 대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 해보자면.


나는 굳은살을 만들어.


역도를 하다 보면 손바닥이 정말 아파.

바벨을 잡은 손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바벨의 손잡이 부분이 까끌까끌하게 되어 있거든.

그런데 무게가 점점 올라가다 보면 당연히 바벨을 잡고 있는 손바닥에 무게가 쏠리게 되고

살이 밀리면서 손바닥이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실제로 살이 밀리면서 손바닥이 터지기도 하고, 피부가 벗겨지기도 하고 그래.

하지만 손바닥이 아프다고 해서

너무나 하고 싶은 역도를 참을 수가 없으니까.

상처가 아물고 밀린 살이 단단해져서 굳은살이 배기길 기다리는 거야.

그러고 나면 훨씬 덜 아프니까.

아픔이 반복되다 보면 점점 더 강력한 굳은살이 생길 것이고

그러다 보면 점점 덜 아파질 것이니까.


흥분, 분노, 기쁨, 슬픔과 같은 감정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비슷한 것 같아.

나는 잘 참아지지 않는 사람이고

예방보단 수습에 익숙한 사람이고

참지 않아 생기는 후회의 크기와 참아서 생기는 후회의 크기는 비슷하지만

다스리며 느끼는 행복감보다 터뜨리며 느끼는 행복감이 더 큰 사람이라서.

흥분하기 전 기지개를 켜기보단

실컷 흥분하고 난 뒤 꼼꼼하게 스트레칭을 해주기를 택한 것 같아.


조절할 줄 모르고 터뜨려버린 감정들은

스트레칭만으로 정리되지 않을 때가 많지만

후회를 감내하는 데에 조금씩 더 단단하고 커다란 굳은살이 배겨가고 있거든.

감정의 바다가 파도치다 온갖 껍질들만 남긴 채 모조리 빠져나가 버린 고독한 썰물의 시간 동안엔

손바닥에 자리한 굳은살들을 만지며

나의 강인함을 더듬어 봐.

그 굳은살을 믿고 지금은 그냥 이렇게 살아가고 있어.


어쩐지 유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는 것 같네.

유나야

네 후회는 부족한 선택의 결과라기보단,

최대의 노력 후 당연히 찾아드는 피로에 가깝단 생각이 들어.


실컷 기지개를 켜고,

열심히 굳은살을 만들자.

그 뒤 어쩔 수 없이 찾아온 피로는 이렇게 언제든 같이 풀어보자.

나란히 앉아 스트레칭을 하자.


어김없이 사랑으로, 재하가

2022. 12. 07. 오후 7:06



비누, 재하, 유나 세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우리가 정말 이상한 건지 모르겠어요.


비누

최근에는 영화를 만듭니다. 여자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venukwak)


재하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라고 (@brimmingoceanofmulbineul)


유나

엉망장자 (@___lluna)

매거진의 이전글 #06. 당해낼 수 없어 당할 수밖에 없는 감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