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무보수 아티스트
언제인가 새벽에 엄마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왔다.
다음날 아침에 전화해보니 다짜고짜 나에게 화를 냈는데 이유는 이렇다.
"어제 집에서 혼자 와인을 좀 마셨는데 오래간만에 마셔서 그런지 갑자기 심장이 심하게 두근두근 거리는 거야. 심하게 두근거려서 이러다 무슨 일 생기면 시골이라 손도 못써보고 죽겠다 싶어서 119에 전화했는데
나를 취객으로 간주하고.."
나는 119 요원의 정확하고 빠른 진단에 동의한다.
엄마는 취한 것이었고 혼자 시골 작업실에 있는 게 두려웠던 거 같다. 그래도 혼자 죽긴 무서운가 보다.
현재 엄마가 살고 있는 시골(충남 아산)은 그녀의 집이자 작업실이자 창고이다. 1950년대 아산의 간척지에 외할아버지가 직접 빨간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서 만들었다. 집 창문에서 보이는 소나무가 있는데 여기에 배를 묶었던 시절이 있다고 한다. 당시 간척사업으로 확장한 땅에는 소금기가 빠지지 않아 농민들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아산에서 나온 쌀이 제법 맛있기로 유명하다.
그렇다 아산쌀이 자리 잡는 데에는 50년이 걸렸다.
벼들이 50년 동안 고개 숙여왔던 것이다.
엄마도 현재 이 시골구석에서 자신의 커리어 기반을 다지고 고개 숙여 작업에 열중하면 누구든 찾아 보고픈
더 성숙한 작업물이 나오지 않을까.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주는 교훈이 담긴 시골이다.
아래에는 그런 시골에서 열심히 작업을 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 수 있는 이은숙 작가의 글을 옮긴다.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일터든 집이든 원하는 시간에 일을 한다면 무척 자유로워 보일뿐더러 그런 삶을 부러워할 것이다. 헌데 돈이랑 상관없는 경제활동이 안되는 일을 평생 해야 한다면 도 닦는 일과 별 다를 바 없다는 생각도 든다. 출근을 하고 일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실만으로도 일을 열심히 하는것 처럼 보여 지는데 비해 집에 머물러 작업을 한다는건 뭔가 전문성이 떨어지는 거 같다.
전시가 잡히고 그 일정에 맞춰 작업을 할 때는 시간을 쪼개어 쓰느라고 시간표를 짜서 벽에 붙이면서 그렇지 않을 때는 시간이 넘쳐 주체할 수가 없어 시간표를 짠다.
머리 속에서 상상되는 비전과 작업들을 현실로 옮겨오기는 오리무중으로 가끔 뭘 하려고 하는지 그 의미 조차 알 수가 없다. 집에 쳐 박혀하는 일 없이 넋 놓고 멍청이 마냥 그냥 지내는 날도 많다. 내가 봐도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이다. 무척 팔자 좋게 보인다. 하지만 이럴 때가 시간에 쫓겨 작업할 때 보다 더 힘든 때이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때론 과대망상의 즐거움에 빠지다가도 내 삶을 비하하고 우울해지기도 한다. 조울증이 있는 모양이다.
언제인가 전시를 끝내고 앞으로 할 작품을 생각하면서 친구가 선물해 준 포도주를 집에서 혼자 마셔보았다.
멋진 상상을 하며 내킨 김에 한잔을 더 마셨더니 얼굴이 달아 오르고 온몸이 뜨거워지면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심장박동 소리가 내 몸을 폭발시킬 듯 쿵쿵거리기 시작하더니
내가 있는 방과 건물 전체를 날려 보낼것처럼 심장소리가 커졌고 나는 공포에 휩싸였다.
상태가 더욱 심해졌고 내 몸이 시한폭탄처럼 터져 죽음을 맞이 할 듯했다.
밤 12시가 넘어 구조를 청할 때라고는 119밖에 없었고 공포에 떨며 곧 죽을 것이라고 급히 전화를 했다.
당연히 바로 구급차를 보내주리라 생각했다.
구급대원은 유선상으로 술을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를 물었고 나는 사실대로 포도주 두 잔이라고 답했다.
"아주머니, 포도주로 혈액순환이 빨라져서 그러니 창문을 열고 열 좀 식히시면 될꺼예요"
구급차는 오지 않았고 나는 터질듯한 심장 소리를 들으며 혼자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 들였다.
그러자 내가 죽는다는 사실은 하나도 두렵지가 않았으며 아이들이나 가족 생각도 안 났다.
다만 내가 생각하고 있던, 하고 싶던 작품을 다하지 못하고 간다는 게 무척 아쉬웠다.
죽음의 문턱에서 하려고 했던 작품의 형태와 색이 선명하게 떠올랐고 순간 살아야하는 분명한 이유가 생겼다.
“주님, 하고 싶은 작업을 아직 다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데려가지 마시고 못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제가 하고 싶은 작업을 다 할 수 있게 시간을 주십시오”라며 기도를 간절히 반복하느라
나도 모르게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화상 이후 또다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순간을 경험했던 것이다.
절박하게 작품 할 시간을 달라고 기도 했으니 죽기 전까지 생각하고 있는 작품들을 어떻게 얼만 큼을 풀어내야 하는지 계획을 세워야 했다.
나의 지난 작품들은 내가 살았던 아파트 지하실에서 뒹굴다가 파손되기도 없어지기 했다.
지금은 시골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데 사실은 여러 종류의 농기계들과 뒤죽박죽 얽혀있다.
더 이상 작품이 아닌 폐품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중 일부는 선택되어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재 손질하여 크레이트에 들어가 태평양을 건너 새 생명을 얻는다. 하지만 전시가 끝나고 돌아오면 어김없는 시골의 창고 행이다.
<기다리는 영혼들, 1989 > 아파트 지하의 폐수관이 제법 어울리는 작품
당시 살던 아파트의 지하실은 엄마의 작업실이자 창고였다. 머지않아 입주민 회의 결과 쫒겨나지만
작품을 위한 창고가 너무 절실하게 필요하다.
농기계와 함께 비와 황사를 맞는 창고가 아닌 작품만을 위한 수장고 같은 창고 말이다.
작고한 유명 전시을 보기 위해 박물관에 가면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전시의 규모 뒤에 숨겨진 작가의 방대한 작품 양과 관리가 피부로 와 닿으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과연 내가 죽고 나면 내 작품이 이런 뮤지움에 전시될 정도의 규모가 되는가.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생각하고 있는 작품들을 상상만이 아닌 현실로 풀어 나가야 한다.
얼마전 테이블이 필요해 IKEA 갔다가 또한번 가슴이 두근 거렸다.
높은 천장과 복도 양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선반들. 창고 한쪽편에서 소리를 질러도 다른 편에서는 들리지 않는 엄청난 규모의 창고와 정확한 위치에 놓여진 제품. 그리고 이를 운반하는 지개차를 보며 희열을 느꼈다.
“바로 이거야!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IKEA 창고에 물건이 아닌 내 작품이 포장되어 가득 채워지고 전시기획에 따라 ‘어떤 작품이 가야하나’를 고민하며 저렇게 지게차로 운반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무척 흥분되는 일이다.
그 엄청난 규모의 창고에 작품이 가득 쌓이는 상상을 했다.
어떤 상상을 하던 그것을 현실로 이끌어 내는게 내가 하는 일이 아니던가.
전시계획이 없다고, 작업실이 없다고, 작품을 둘 창고가 없다고, 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돈이 안 된다고, 남들이 인정하지 않는 작품 아닌 잡품이라고, 뭘 하겠냐며 회의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내며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때가 후회스러워진다.
오늘도 상상에 상상을 거듭하며 마냥 시간을 보낸다. 곧 정신없이 쫓겨 일할 때를 대비하여 쉬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