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미술 작가가 아파트 통반장으로 거듭났던 이유
"신이 내린 벼슬 - 아파트 반장의 갑질"
"아파트 입주민 대표 50억 비리에 벌금은 고작 1천만 원"
요즘에도 이런 뉴스는 끊이지 않는다.
학창 시절 공부는 못했지만 친구들에게 쫀득이를 사주며 반장 선거에 나를 뽑아 달라 했던 기억이 난다.
반장의 부모는 학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교사와 소통하여야 하며 심지어 각종 명목으로 가정에 지출이 생긴다는 점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쫀득이의 힘으로 난 이미 반장이 되었고 친구들은 축하 기념으로 햄버거 세트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가라는 엄마는 '반장엄마' 타이틀을 외면했으며 우리 반은 다른 반 아이들보다 찌질한 한해를 보내야 했다.
운동회 축제 때 다른 반이 패티가 2개 들어간 햄버거+감자+콜라 세트를 먹으며 응원할 때 우리는 김밥 생수 세트(?) 먹었다. 요즘은 햄버거보다 고급김밥이 단가도 높고 건강식이라 학부모들이 선호한다는데 이럴 땐 예술가가 한 발 앞선다는 게 실감이 난다.
엄마는 다른 학부모와 교내 환경 개선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고 요구하기는커녕 내가 체육 선생님께 골프채로 맞고 와도 관심 없던 작가다.
이런 엄마가 아파트 통-반장을 했다.
문제 발생 시 입주민의 의견을 수집하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려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직책에 남을 대변할 줄 모르고 자신의 의견은 모순되더라도 밀고 나가는 이 아줌마가 아파트 통-반장을 했었다니...
당시 규모가 꽤 큰 1,400세대 아파트 단지에서 통-반장을 스스로 맡아하다니..
앞서 봤던 아파트 반장의 갑질 케이스인가..
작가 생활을 위한 비자금 마련인가..
이 궁금중을 풀어줄 엄마의 글이 있어 옮긴다.
-작가 이은숙의 글 중-
내가 작업을 하면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어떤 여건이든 좋은 작품을 한다는 게 최우선이었다. 작업실이 있어야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아니었고 좋은 작업실에서 작업을 해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과 지내며 살림을 하며 난 부엌에서 거실에서 침대방에서 이리저리 옮겨가며 작업을 했다.
작품이 커지면서 완성된 작품은 집에서 제대로 한번 펼쳐보지도 못하고 전시장에 가서야 처음으로 전체를 볼 수 있었다. 당시 ‘육신과 영혼’ 작품을 제작했는데 까만 아크릴로 관 3개를 설치하는 작품이었다. 전시전에 관 3개가 쪼르륵 거실에 눕혀져 있는 걸 보니 정말 섬뜩했다. 집에서 이런 작품을 하다가 정말 이런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하면서.. 그야말로 집이 아닌 작업실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작업실을 구하러 다녀봤지만 쉽지가 않았다. 특히 아이들을 돌보며 작업을 하려면 집에서 가까워야 했는데 서울 근교는 멀었고 서울은 경제적으로 만만치 안았다. 내가 처해있는 상황에서 최선의 방도를 스스로 찾아야 했다. 요즘 짓는 아파트는 지하공간을 주차장으로 쓰지만 당시 살던 아파트 지하는 방공호용으로 비워 놔야 하는 공간이었고 주로 재활용 쓰레기나 신문지 등을 쌓아두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때로는 주민들이 버리기는 아까운 살림살이 등을 쌓아 놓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나 역시 전시가 끝난 작품을 살림살이처럼 포장하여 몰래몰래 갖다 놓았다. 물론 잃어버릴 수 있음을 각오하고 말이다.
그러다 점점 그 지하공간이 탐나기 시작하였다. 주민 몇 명의 지지로 나는 반상회에서 거론을 하게 되었다.
“올해 말 전시가 있는데 집에서 제작한 작품을 둘 곳이 없어서 전시 오픈할 때까지만 지하실에 보관을 좀 했으면 좋겠어요”라며 동정을 살핀 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니까 혹시라도 잃어버릴걸 대비해서 중간에 문을 달면 어떨까요?”라고 슬쩍 덧붙이기까지 했다. 사실 주민들은 쥐도 다니고 오수 파이프에 악취가 나는 지하공간에는 관심도 없었다. 말은 작품 보관이라고 했지만 난 작업실로 쓸 요령이었다.
다행히 반상회에서 과반수 찬성으로 통과는 됐지만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서는 아파트 각 세대 한집도 빠짐없이 도장을 받으라고 하였다. 막상 도장을 받으려고 하니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집이 여러 집이 있어 몇 번을 찾아가 계속 설명하고 설득하여 겨우 도장을 다 받을 수가 있었다. 지하실을 자주 왔다 갔다 하려면 일반 주민이 아닌 반장이나 통장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지하실을 의심 받지 않고 자주 왔다 갔다 하려면 통장을 해야 한다.
그 후 매달 동사무소 회의에 참석하며 통장의 자리를 넘봤다. 막상 통장과 반장이 되자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살림하며 작업해야 하는 일도 벅찬데 통-반장 직을 겸하기란 쉽지가 않았으나 지하공간을 쓰기 위하여 어쩔 수 없었다. 다소 엉뚱한 공직의 일을 해야 했다. 남자도 아닌 내가 민방위 훈련, 소방훈련 그 외에 구청에서 행하는 여러 안전행사 모두를 참석했는데 항상 나이가 제일 어린 통장이었다. 그러면 어떠랴. 지하를 작업실로 쓸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을 얻은 것 같았다. 아침 일찍 아이들 도시락과 내 도시락을 싸서 아이들이 집을 나서면 나는 곧장 지하실로 출근했다. 들락날락 하는 게 눈에 띠일까 봐 도시락은 물론 그날 마실 물과 휴대용 요강까지 준비하고 내려갔다. 집 전화로는 제일 성능이 좋은 일제 무선전화기를 장만해 지하실에서 통화가 되는지 확인도 했다. 주위를 살핀 후 재빨리 지하실로 내려가 작업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많은 양과 평소 하고 싶었던 큰 스케일(15m)의 작업을 사다리를 놔가며 제작했다. 아이들이 올 때가 되면 할 수 없이 집으로 올라가 저녁을 해 먹고 또다시 내려와 밤늦도록 작업을 했다.
같은 건물인 집과 지하실로만 왔다 갔다 지내다던 어느 날 쓰레기를 버리러 밖으로 나갔는데
선선히 와 닿는 바람과 공기가 어찌나 신선했는지 순간 안네 일기의 안네가 생각났다.
처마 밑 골방에서 3년을 숨어 살다가 포로수용소로 끌려 갔을때 그곳의 자연 공기가 신선해 오히려 골방보다 낫다고 했던 안네. 자유를 억압당해도 싱그러운 자연 공기가 좋았다는 안네가 이해되었다.
지하실 환경이 열악하기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석면 그대로 처리된 천장, 모든 생활폐수가 흘러가는 여러 종류의 파이프, 무슨 물인지 알 수 없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 게다가 어느 집 하수구가 막혔다고 하면 무지막지한 기계로 지하실 파이프를 뜯어내는 공사가 끈임 없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작품을 한쪽으로 밀어 놓았지만 쏟아지는 하수구 물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며칠 치우고 마르면 다시 작업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숨어서 작업한다는 게 불안해져만 갔다. 인기척이 나면 불을 끄고 가슴 조이며 아무도 없는 척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전시 한 달 반 정도를 남겨놓고 아파트 관리소장, 부녀회장, 자치회 회장… 아파트 단지 내 장자 붙은 사람은 다 모여서 아침 일찍 우리 집으로 쳐들어왔다. 나를 보자 현상범의 범인이라도 잡은 양 나를 몰아세우며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들은 전기는 공동전기를 쓰지 않았느냐는 둥(내가 살던 2층 집에서 전기를 끌어와 썼음) 개인 공장을 차렸냐는 둥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냐는 둥 아주 거칠게 대했다. 나는 죄인의 떨리는 심장으로 우리 동에 사는 주민 허락을 다 받았다고 통-반장으로서 맞섰지만 그들은 내가 사는 16동의 공동 지하가 아니라 아파트 단지 전체의 공동 지하라면서 절대 개인이 쓸 수 없는 공간이라며 당장 치우라는 것이었다. 전시할 때까지 한 달 동안만 작품을 두면 어떻겠냐고 둘 곳이 없다고 사정을 했지만, 작품으로 봐주기는커녕 인화성이 높은 화학물질이라며 안 된다는 것이다.
약 6개월간의 지하 작업실은 그렇게 쫓겨났다.
몰래 도둑질로 훔쳐 쓴 공간에서 쫓겨났지만 나한테 너무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때 그지 하에서 만든 작품 중 일부는 3년 후 독일과 인연을 맺어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뮤지움과 라이프치히의 그라시아 뮤지움에 초대 전시되었고 이 전시에서는 한국에서 이루지 못한 퍼포먼스와 사운드가 같이 행해졌다. 몰래 숨 조이며 작업했던 아파트 지하작업실은 정말 대단한 위력이 있었다.
그렇다. 엄마는 1990년대 초 부터 아파트 통장으로 활동하며
개인 작가 활동에 이득을 본 前아파트 비리의 주인공 이였다.
이은숙 작가
www.eunsooklee.org
www.facebook.com/eunsooklee.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