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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승 Feb 14. 2020

1. 현대미술은 어렵다?

낮과 밤, 남과 여, 흑과 백, 참과 거짓, 삶과 죽음, 정신과 몸…. 우리는 세계를 둘로 나누어 보는 데 익숙하다. 이분법이라 한다. 근대의 사유체계를 구성한 서구 철학은 줄곧 세계를 저편과 이편으로 나눴고, 이편 아닌 저편을 고자 했다.  


플라톤(Plato B.C. 427~347)에 그 기원을 둔 이해에 따르면,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참이 있지 않고, 이편 너머 내 눈이 닿지 않는 저편 어딘가에 참이 있다.  이데아(idea)라고도 하고 실재(實在)라고도 한다. 예컨대 내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연필은 연필의 참이 아닌 그 참을 닮은 하나의 형상에 불과하다. 참된 연필은 저편의 이데아에 있다.


플라톤은 진짜를 보지 못하는 인간 존재를 동굴 속에 사는 죄수로 비유했다. 동굴 속에 묶여 사는 인간은 동굴 밖의 태양빛을 알지 못한다. 다만 눈앞의 동굴 벽면을 세계로 알고, 동굴 안으로 스며든 빛줄기에 비친 그림자를 보며, 허상을 실제로 착각할 뿐이다.

그런 이해로 볼 때 예술은 허상인가, 실재인가. 시각예술은 이미지에 다름 아니고, 이미지는 실재보다 그림자에 가깝다. 이데아의 질서를 지향하던 플라톤이 예술가를 추방하려던 이유이기도 했다. 인간 현실이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한데, 예술 특히 시각예술은 그 모방을 모방하는 눈속임에 불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과거의 예술에서 관건은 유사성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재현(representation)’의 문제였다. 대상을 얼마나 닮게 그려내느냐, 얼마나 똑같이 만들어내느냐를 기준으로 좋은 예술과 그렇지 못한 예술을 가렸다. 일종의 기술이었던 셈이다.


유명한 일화도 있다. 플라톤의 저작에도 그 이름이 보이는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Zeuxis)와 파라시오스(Parasios)는 당대의 라이벌이었다. 두 사람이 솜씨를 겨루는데, 제욱시스가 그림 막을 들추자 탐스러운 포도넝쿨에 지나던 새들이 와서 부딪혔다. 제욱시스가 파라시오스에게 다가가 이제 그림 막을 들추라 하자, 파라시오스는 말했다. “그 막이 내가 그린 그림일세.” 승리는 동료의 눈까지 속인 파리시오스에게 돌아갔다.

결국 눈속임이라 할 수 있다. 실재 아닌 가상을 그린다고 폄하됐던 화가들은 더욱 현실을 구현하고자 매진했다. 재현의 원칙 아래 과거의 관객들은 차라리 속은 편했다. 눈앞의 회화가 풍경화인지 정물화인지 대번에 보였고, 그 풍경이 자연과 얼마나 닮았는지 평가할 수 있었다. 보이는 바가 투명해 보였다.


그런데 오늘의 예술은 더 이상 투명하지 않다. 보이지 않는다. 눈앞의 회화가 풍경을 그렸는지 인간을 그렸는지 사물을 그렸는지 알 수 없다. 그에 앞서 회화인지 조형인지 매체 구분조차 불투명해졌다.


예술가들이 재현의 원칙을 버리고, 더 이상 세계를 모방하길 거부한 이래 오히려 초조한 쪽은 관객이 됐다. “뭐가 보여?” “보이긴 해?”라고 묻는 듯한 작품명 ‘무제’ 앞에서 관객은 진땀을 뺀다.

홍영인,<새의 초상을 그리려면>,2019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1층 1전시실 초입을 장식한 작품 <새의 초상을 그리려면>은 시각예술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재현의 조건에 대해 묻고 있다. 새의 초상을 그리려면? 우선, 그리는 자와 그려지는 새가 있어야 한다. 주체와 대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데카르트 이래 근대 사유에서 주체는 세계를 대상화해왔다. 인식 주체의 주관이 객관에 비해 철저하게 우위를 점하면서 대상 및 자연을 마음대로 구성할 수 있었다. 대상과 자연은 무방비로 노출될 뿐이었다.


그리는 자는 주체이고, 이 작품에서 주체는 새를 그리고자 한다. 대상은 새인데, 새가 보이지 않는다. 철장 안으로 나뭇가지가 보이고 새소리가 들린다. 지저귀는 저 새가 실재인지 허상인지 혼란스럽다. 새의 움직임을 쫓아보지만 보이는 건 벽에 비친 그림자뿐이다.


새를 보고자 했던 나는 동굴 속 손발 묶인 죄수가 된 듯 불편해진다. 인간이 동굴 속에 묶여 있다는 건 무지와 편견, 통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세계의 주인으로, 세계를 재단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허상 앞에서 진짜를 찾고자 하는 어리석은 존재가 인간이다.


나는 작품 속을 걸으며 불현듯 깨닫게 된다. 아, 철망 안에 내가 갇혀 있구나. 무지와 편견과 통념에 사로잡혀 거대한 철망 구조물을 새를 가둔 새장이라고 짐작했던 나였다. 좁은 통로를 걷다 보니 갇힌 쪽은 새가 아니었다. 철망 안에 갇혀 그림자를 보며 진짜 새를 찾으려 든 내가 그제야 보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2019》(~2020. 3. 1)에 초대된 홍영인 작가는 이 작품에서 ‘동등성 (同等性)’을 말했다. “인간도 동물이고, 우리가 인정하지 않지만 동물은 다른 질서에서 살아갈 뿐 인간보다 하등 한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작품 근저에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새장의 안과 밖이라는 이분법적 공간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뒤집어 놓았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본다’는 행위에 대한 의표 찌르기다. 그간의 통념대로라면 보는 쪽이 인간이기 마련이지만, 홍영인 작가의 작품 속 보는 주체는 새라 할 수 있다. 관객은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새가 어디서 지켜보는지도 알지 못한 채 속수무책 스스로를 노출한 보이는 존재일 뿐이다.


보인다는 건 보이는 입장에서 꽤나 불쾌한 일이다. ‘보이는 대로 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보는 행위는 그리 투명하지 않다. 본다는 행위에는 권력의 위계가 작동하고, 보는 자가 보고자 하는 바대로 보는 일방의 행위인 탓이다.


현대미술이 관객에게 어렵게 느껴진다면 바로 그간의 보던 행위가 더 이상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 마음대로’ 보고자 하는 시선이 불투명한 현대미술 작품 앞에서 꺾여버리고 마는 것이다. 현대미술 작품들이 전제하는 바는 상호 간의 바라봄이다. 마음의 준비가 됐다면, 현대미술로의 첫걸음을 시작해도 좋겠다. 기꺼이 동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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