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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Apr 26. 2019

지적 호기심으로 채운 경이의 방

분더카머, 침묵 게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 [cabinet de collectionneur] 실험실은 언젠가 긴 글이 될지도 모를 글감을 아카이빙하는 공간입니다.  브런치블로그인스타그램에서 새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분더카머, 침묵 게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collectionneur [kɔ(l)lεksjɔnœːʀ]

1. (명사) 수집가

2. (명사) 애인을 많이 가진 사람 




# 지적 호기심으로 채운 '경이'의 방, 분더캄머 


거의 매일 브런치와 블로그에 뭔가를 끼적이던 때가 있었다. 작가로 계속 활동할 수 있겠다(혹은 활동하겠다)는 확신이 아직 서지 않았던 때, 기성 작가들의 글을 읽다 종종 이런 한탄과 마주하면 의아했다. '청탁받은 글만 썼더니 이제 청탁이 안 오면 글을 못 쓴다. 원고료가 없으면 글을 못 쓴다.' 


누군가 내 글을 발견해주길, 인정해주길 기대하며 매일 '발행' 버튼을 누르던 당시의 나는 이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안 시켰는데도 글을 쓰는데, 누가 돈까지 쥐어 주면서 글을 써달라고 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 그럼 평소 쓰는 돈 안 받는 글도 더 신나게 쓸 것 같은데? 청탁 없이 글을 못 쓰는 작가들은 그럼 평소엔 뭐 하는 거지? 누워서 생각만 하나? 


분명 저런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는데, 5권의 책을 내는 동안 자발적 글쓰기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나 역시 어느새 '일'이 아니면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긴급 처방이 필요했다. 'cabinet de collectionneur' 시리즈를 만든 이유다. 


매일 머릿속을 스쳐가는 수많은 생각과 질문을 흘려보내지 않고 움켜쥘 순 없을까? 단단히 채비해서 제대로 된 글 한 편을 등반하는 일도 의미있겠지만, 부담없이 가볍게 산보하듯 생각과 생각 사이를 쏘다닐 순 없을까? 실패에 대한 부담 없이 별 뜻 없이 '그냥 해보는' 실험 같은 글쓰기를 할 순 없을까? 매일 보고 듣고 감탄한 것을 내 언어로 소화시킬 순 없을까? 집요하게 생각해야만 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만들어 줄 수 없을까?


이런 여러가지 동기로 새로운 시리즈를 열고 이름을 뭘로 지을까 고민하다가 떠오른 그림들이 있다. 



프란스 프랑켄 2세, 예술과 호기심의 컬렉션, 1636


약제사 페란테 임페라토의 자연사 박물관 방문, 1599


도메니코 렘프스, 호기심의 캐비닛, 17세기


현재 우리가 보는 박물관, 미술관 형식의 공간이 탄생한 건 18세기에 이르러서라고 한다. 그 전까지 유럽 각국에는 진기하고 신기한 사물과 예술품을 한꺼번에 모아놓은 공간을 일컫는 말이 있었다. 독일에서 가장 먼저 '경이의 방'이라는 의미로 분더카머(Wunderkammer)라 불렀고, 프랑스에서는 '호기심의 방'이라는 뜻으로 카비네 드 큐리오지테(cabinet de curiosité), 이탈리아에서는 스투디올로(studiolo)라고 불렀다. 현대에도 'cabinets of curiosities'는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집품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18세기 이후 생겨난 박물관처럼 체계적인 분류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분더카머 안에는 온갖 종류의 경이로움이 뒤섞여 있었다. 예술품이 보여주는 아름다움, 처음 보는 해양 동물의 외양에서 느껴지는 신기함, 멀고 먼 이국에서 온 물건들에서 느껴지는 낯섦... 이 모든 것이 '경이의 방'에 섞여 있었다. 


이 점을 새로운 시리즈의 정체성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명화, 그림책, 책 속 문장, 유튜브, 음악, 영화 대사, 길 걷다 주운 생각 등등 뭐든 가리지 않고 호기심의 레이더 망에 들어온 것을 전부 모아보기로 했다. 탐욕스러운 정복자의 마음보다는 사랑하는 자의 마음으로, 애인을 많이 가진 collectionneur처럼, 너그럽고 유연한 시선으로 자주 감탄하면서.  





만약 내가 기행문을 쓴다면, 나는 그 기행문을 쓸 수 있는 어떤 관점이 보일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 버지니아 울프, <어느 작가의 일기>, 196쪽




 # 애써 발명해야 누릴 수 있는, 침묵


이탈리아 작가 실비아 베키니가 글을 쓰고, 마리아 히론을 그림을 그린 그림책 <침묵 게임에 초대합니다>를 읽었다. 살면서 침묵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건 모두가 알지만, 구체적으로 침묵이 어떤 순간을 뜻하는지, 그 순간에 침묵이 우리에게 해주는 일이 무엇인지 누구나 공감가는 쉬운 언어로 설명하는 일은 일부의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이다. <침묵 게임에 초대합니다>는 차분하고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들로 훌쩍 그 일을 해낸다.  





침묵 게임의 목적은 마음 속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면서 내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찬찬히 들여다보는 거예요.

침묵 게임은 중요한 무언가를 기억해야 할 때, 생각을 정리해야 할 때 도움이 돼요. 침묵은 거리를 깨끗이 청소하는 빗자루 같아서 머릿속도 깨끗하게 정리해 준답니다.

침묵은 하얀 눈처럼 보드라워요. 쉽게 녹아 없어지는 눈처럼 빨리 사라지기도 해요. 


괜시리 마음이 바쁘고 어수선한 날 펼쳐볼만한 (적당히) 좋은 책이라 생각하고 덮으려는 찰나 원서 제목이 궁금해져 검색을 해봤다. 원제를 알고 나서 책에 대한 호감이 훨씬 커졌고, 이 생각을 기록해야겠다고 결정했다. 책의 원제는 이탈리아어로 La mia invenzione, 영어로는 My invention이다. 한국어 제목에서는 발명이라는 단어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아이가 발명한 침묵 게임에 초대한다는 메시지로 살짝 감추어졌다. 


'침묵을 발명한다'는 발상이 흥미롭다. 설득력 있는 통찰이라 생각한다. 별 의식없이 살다보면 당장 주의를 빼앗는 일 위주로 시간을 쓰게 된다. 머릿속을 깨끗이 정리하는 시간, 내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내는 날이 훨씬 많다. 침묵은, 응시하는 시간은, 굳이 애써서 노력해야만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발명해내듯 말이다. 





예술은 우리를 답답함과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함의 상태 속에 가둬서 그러한 만족을 유예시키며, 그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단순히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멈춰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다. 
- 그레이스 페리,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은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101쪽 



#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젊은 예술가에게 전하는 조언 


https://youtu.be/8Ck2q3YgRlY


좋아하는 은사님께 들은 조언이 있습니다. “만약 네가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눈을 감고도 원하는 건 뭐든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오른손을 연마해라. 그리고 그 경지에 이르면 즉시 왼손으로 바꿔라.” 





# 프랑스 고문서&일러스트를 무료로 보고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공공사이트 Gallica 



프랑스국립도서관(BnF)이 만든 이미지, 문서 아카이브 사이트 Gallica는 나의 인터넷 즐겨찾기 목록 최상단에 위치한 사이트다. 수백 년 전 그림책 일러스트, 패션잡지 삽화, 생물도감 일러스트, 오래된 지도 등등 현대의 일러스트레이션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미감을 가진 그림들을 실컷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볼 수 있기만 한 게 아니라 고문서 전체를 통째로 PDF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어서 책 표지, 면지 등 편집 리듬까지도 감상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오늘 다운로드 받은 책은 1719년에 출간된 어류도감이다. 네덜란드 동인도주식회사가 파견한 그림 작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프랑스 편집자이자 서점인 루이 르나르(Louis Renard)가 출판한 이 어류도감은 작업 기간만 30년이 걸렸다고 적혀 있다. 세밀화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느낌에 일단은 눈이 즐겁지만, 한 컷 한 컷 넘기다 보면 말 그대로 한 땀 한 땀 책을 빚어낸 300여년 전 작가들의 헌신에 마음이 숙연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의미는 그림 속에도 있지만, 보는 사람에게 주어지며, 보는 이가 찾고 부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이를테면 어떤 작품이 내 기억 속의 누군가를, 아니면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한다면, 그것이 곧 작품과 내가 맺은 관계(기억을 불러내는 관계)이자 내용이고 의미죠. 
- 조경진, <느낌의 미술관>, 24쪽


* [cabinet de collectionneur] 실험실은 언젠가 긴 글이 될지도 모를 글감을 아카이빙하는 공간입니다.  브런치블로그인스타그램에서 새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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