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째 아침. 여전히 이른 아침부터 혼자 눈을 떴고, 귀를 창가쪽으로 기울였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의 귓가에 들려왔다. 오늘은 무엇을 해야하나 고민을 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구글 지도를 보며 오늘 일정을 정하던 중, 미리 한국에서 표시 해 둔 스탠리 파크와 캐필라노 현수교가 눈에 들어왔다.
‘옳지, 여기가 있었지.
‘하필이면 비가 오는데…’
한참을 고민했다. 스탠리 파크에서 자전거도 타고 (임산부는 절대 타면 안된다) 산책도 하고 싶었지만 비가 오면 전부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날씨 탓으로 돌리며 안가면 일정상 밴쿠버를 둘러보는 날은 귀국하는날 빼면 오늘이 마지막이기 때문에 기약없는 약속을 해야했다.
그렇게 혼자 끙끙 앓으며 고민을 하던 찰나, 슬로베니아 여행 당시 피곤하다는 이유만으로 다음날로 미뤄서 결국 가지 못했던 류블랴나 성과 블레드 성이 떠올랐다. 그 때 조금만 더 부지런했다면 지금까지 후회를 안했을거란 생각에 결국 이 두 곳을 모두 가보기로 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캐필라노 현수교는 숲이라는 생각은 안하고 그냥 감악산 출렁다리처럼 계곡을 건너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
스탠리 파크
전날의 일정이 매우 여유로웠는지, 와이프도 곧바로 일어났다. 오늘 일정을 간단하게 설명해줬고,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면 와이프도 나랑 비슷해서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일정을 진행하기로 했다. 내일은 캘거리로 이동해서 렌트카 여행을 시작해야했기 때문에, 일정 중에 컨디션이 안좋으면 오늘 하루는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스탠리 파크 입구에 도착하니, 간단하게 조깅을 하는 사람 외에 관광객은 아무도 없었다. 무언가를 즐기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닌, 귀국 후에 한국에서 후회를 안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기 때문에 큰 욕심없이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코끝을 자극하는 기분 좋은 흙냄새와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숲의 청량한 냄새를 맡으며 공원을 걸었다. 그리고, 사람이 없어서였는지 비가 내려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정적인 분위기로 인해 말없이 서로 숨소리만 들으며 걸어도 충분히 운치가 있었다.
흐리고 비가 와도 이렇게 좋은 공원이, 파란 하늘에 시원한 가을바람이 부는 날에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란 생각에 잠시 아쉬워졌다. 그런 날에 방문하게 된다면 하루 종일 스탠리 파크에서만 놀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숲과 같은 공원의 정취에 흠뻑 빠졌다.
지도상에서도 광활한 크기를 자랑하는 공원 덕분에 난 적당히 타협점을 찾으며 일부의 관람만으로도 큰 만족감을 느꼈다. 틈틈이 와이프의 컨디션을 체크하며, 마지막 일정인 캐필라노 현수교를 향해 버스로 이동했다. 다운타운 내에는 캐필라노 현수교로 이동하는 무료 셔틀이 있지만, 내가 있는 위치에서는 탑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반 시내버스를 이용해서 이동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밴쿠버에 머무르는 동안에 가장 큰 고민을 해야 했다.
캐필라노 현수교
처음 생각했던 캐필라노 현수교는 출렁다리처럼 그저 계곡 사이에 있는 다리이며 잠시 들렸다가 구경만 하고 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입장료가 있을 것이라곤 처음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막상 도착했을 때 매표소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생각보다 비싼 입장료를 보자마자 나와 와이프는 서로 말없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입장료가 1인당 약 5만 원이었는데, 다들 표를 구매하고 입장하는 것을 보니 공짜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어쩌지..? 너무 비싼데 돌아갈까?'
'가면 또 후회할 텐데, 근데 너무 비싸다..'
가격 외에도 비가 와서 제대로 구경을 하지 못할까 봐 합리적인 내적 갈등을 하다가, 그래도 이 또한 하나의 추억이라는 여행 감성을 내세우며 입장료를 결제하고 내부로 들어갔다. 비가 오니 입구에서 무료로 우비를 제공했고, 양 팔이 자유로워진 나와 와이프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곧바로 메인 캐필라노 현수교가 나타났다. 축 늘어져있는 다리와 비로 인해 안개가 낀 계곡은 너무 몽환적이었다. 해가 떠있는 맑은 날씨의 이곳의 풍경을 상상해봤지만, 오히려 너무 당연한 풍경에 큰 감흥이 없었을 것 같았다. 지금처럼 차분하면서도 깊은 무언가의 분위기가 오히려 더 좋게 느껴졌다.
'비가 와서 다행이야'
나도 모르게 속으로 했던 생각이었다. 망설임 없이 곧바로 현수교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다리의 중간에서 마주한 모습은 잠시 멍 때릴 정도로 절경이었다. 시원하게 귓속을 파고드는 물 흐르는 소리와 우비 사이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하염없이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잠시 여기서 발걸음을 멈추고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현수교를 건너면 곧바로 나타나는 오아시스 같은 카페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핫초코를 주문한 다음, 자리를 잡았다. 어제 그랜빌 아일랜드에서 샀던 빵과 치즈, 사과로 만든 샌드위치와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다.
현수교 건너편에 있는 카페 옆으로는 숲 내부를 걸을 수 있는 길이 아주 잘 되어있다. 가파르지도 않고, 그저 길 따라 걷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몸이 무거운 와이프도 부담 없이 둘러볼 수 있었다. 가족단위로 오더라도 남녀노소 상관없이 누구나 쉽게 관람할 수 있도록 잘 되어있으니, 밴쿠버에 여행을 온다면 날씨 상관없이 꼭 일정에 넣어 한 번은 둘러보도록 하자.
특히, 나무들 사이로 연결된 길을 걸을 땐, 숲을 위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밑에서 하늘을 향해 쳐다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숲의 더 깊은 내면을 바라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우비를 계속 두드리는 비를 맞으며 걷는 숲은 나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 지난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비를 맞으면서도 이렇게 기분 좋은 여행을 한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봤다.
2년 전에 떠난 스위스의 아이거 북벽이 내려다보는 그린델발트에서도 비가 왔을 때는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었다. 확실히, 비가 오는 캐필라노 현수교로 일정을 정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매표소에서 입장료가 아까웠다면 난 평생 이 기분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숲속에서 좋은 공기를 가슴 가득히 담을 정도로 둘러보고 다시 현수교를 지나왔다. 그리고 다리 중간에서 숲을 둘러보았을 때, 안갯속에 갇혀 묘한 분위기를 내는 탓에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클리프 워크(Cliff Walk)로 이동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치듯 카메라를 들고 있는 이상 나는 저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너무 담고 싶었다.
절벽 따라 길을 만들어서인지, 아니면 자연 훼손을 최소한으로 하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길은 정말 좁았다. 딱 필요한 만큼만 통로 길이를 만들었고, 오로지 편도만 고려한 길이었다. 한번 발을 내디뎠다면, 다시 돌아가기 위해선 무조건 끝까지 걸어가야 했다. 코스가 길지 않으니 나가는 길에 잠시 들려도 좋다. 아니, 빼놓고 가면 섭섭할 정도로 바라보는 경치가 좋으니 꼭 들리도록 하자.
이 클리프 워크(Cliff Walk)에서는 계곡을 이어주는 현수교의 모습을 옆에서 바라볼 수 있으며, 계곡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줄기를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진을 찍으면 정말 예쁘게 나오는 매력이 넘치는 곳이다.
클리프 워크까지 완주하고 나니, 뿌듯함이 몰려왔다. 매표소를 다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앞에서 불과 몇 시간 전에 했던 고민이 참 쓸모없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만약, 여기서 다시 되돌아갔다면 이런 절경을 난 평생 보지 못했을 것이다. 먼 미래에 밴쿠버를 다시 찾은 날, 캐필라노 현수교에 다시 도착해서 그때의 결정을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참 잘 왔어'
'돈이 전혀 아깝지가 않은 곳이었어.'
무료 셔틀을 타고 다시 밴쿠버의 다운타운을 향하면서 와이프와 나눈 대화였다. 아침 일찍부터 스탠리 파크를 시작으로 많이 걸었다. 와이프에게 컨디션을 물어보니 괜찮다고 말했지만, 표정은 피로감이 몰려와있었다.
'오늘 일정은 여기에서 마무리해도 딱 좋을 것 같아'
그렇게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 오늘의 일정만큼 휴식시간을 가졌고 다음 날 공항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