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들에 대해
지금에 와서야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어떤 희미한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책을 읽는 일.
-만년필과 연필을 필기도구로 애용하는 일.
셋 다 시간을 들여야 한다. 시간만 있어서 되는 일은 아니고 적극적으로 나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다소 번거롭기도 하다.
21세기 현대사회(특히 한국)는 모든 것이 숨 가쁘게 흘러간다. 좋은 말로 하면 신속한 것일 테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느린 것은 배척 혹은 배제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은 모두 바쁘다. OECD국가 중 일을 제일 많이 하는 나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모든 이들의 발걸음이 다급하고 숨찬 이 세상에서 나 역시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나는 내 속도를 유지하고 싶은 순간이 훨씬 많다.
먹고사는 문제는 너무나 눈앞의 현실이라 모두가 바쁘게 움직일 때 나 혼자만 태평하게 있을 수는 없지만 잠시 시간을 들여 책의 몇 페이지쯤을 읽을 수 있고 만년필에 잉크를 채울 수 있고 연필 한 자루 정도는 깎을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한 번에 다 읽으려 들면 버겁거나 불가능한 목표가 되어 시작하기도 전에 지친다. 하지만 가방에 넣어 다니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몇 장씩 읽다 보면 들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도 전에 책 한 권을 다 읽은 내가 되어 있다. 이 순간이 퍽 뿌듯하다. 책 한 권을 다 읽는다고 해서 몰라볼 정도로 사람이 달라지거나 갑자기 원대한 포부를 가지는 야심 찬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책을 읽기 전의 나와 다 읽은 후의 나는 분명 조금쯤 다르다.
연필 한 타를 한 번에 다 깎는 일은 좀 더 수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12자루의 연필을 다 쓰겠다는 부담감에 짓눌릴 수도 있다. 한 자루를 깎아서 수시로 쓰다 보면 어느새 몽당연필이 되어 있거나 손에 쥐기 힘든 정도의 길이가 되어 새 연필을 찾게 한다. 연필의 길이가 짧아지면 짧아질수록 괜스레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면서 웃음이 난다. 기분이 좋다.
만년필에 잉크를 채워 쓰다 보면 만년필의 카트리지와 닙을 청소해야 하는 때가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딱히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고 찾아본 것도 아닌데 만년필은 철저히 쓰는 사람에게 맞춰 길들여지는 필기구라 그냥 쓰다 보니 알게 됐다. 컵에 물을 채워 닙과 카트리지를 담가두면 시간을 두고 서서히 물에 잉크가 번지기 시작한다. 물을 한 번 갈아온다. 같은 일을 반복해 본다. 더 이상 잉크가 물에 번지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는 일은 자칫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느새 깨끗해진 닙과 카트리지를 보면 그게 참 마음이 좋다.
책도, 연필도, 만년필도 모두 읽고 쓰는 사람에 맞춰 길들여진다.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때에 책의 페이지를 접어둘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길이에 맞게 연필심을 드러낼 수 있다. 잉크를 채워 쓰는 카트리지 형태의 만년필이 좋은지 잉크에 펜을 직접 담가야 하는 딥펜 형태의 만년필을 쓸 것인지 취향과 용도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이 모든 걸 내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
회사에 있으면 나는 나라는 사람 자체가 필요하다기보다 회사를 잘 운영하게 하는 부속품 1에 지나지 않는다는 감각을 느낄 때가 더없이 많다.
이런 감각에 멀미가 날 때쯤 읽다만 책을 집어 들고 연필로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을 그은 다음 두터운 종이에 만년필로 필기를 한다. 이런 순간들이 나라는 사람을 잃지 않게 해주는 방어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빠르고 숨찬 세상에서 철없고 한갓진 소리로 들린데도 나는 나만의 고요를 포기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