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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은 돼지 Aug 19. 2017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Le passé, 2013)

과거의 상흔에 사로잡힌 사람들 간의 뒤엉킨 카르마

이 영화는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이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제작한 영화입니다. 프랑스어 원제가  Le passé , 영어 제목은 The Past 즉, 과거 혹은 지난 날입니다. 한국 개봉 작품명은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입니다만 실제 영화를 보고 나면 타이틀은 '모두가 머물렀다'가 오히려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국내 개봉 제목이 오히려 작품을 해석하는 관점을 지나치게 피상적으로만 제한하는 경우가 종종있는데, 이 영화도 타이틀 선정이 관객들에게 엉뚱한 방향으로 영화를 해석할 수 있도록 암시하는 썩 좋지 않은 예로 기억될 거 같습니다.


이 영화는 이혼 수속을 밟기 위해 프랑스로 온 전 남편 아마드(Ali Mosaffa 역)와 전 아내 마리(Bérénice Bejo 역), 그리고 그녀가 새로 결혼을 계획하고 있는 남자 사미르(Tahar Rahim 역) 이렇게 세 사람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마드와 마리는 처음 만나는 장면부터 마치 방음이 잘된 유리방에 갖혔던 사람들 처럼 단절된 소통의 단면을 보여주고, 사미르와 마리는 아직 아마드의 결혼 생활이 채 정리되지 않은 채 아이부터 털컥 가져버린 불안한 출발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자살 기도로 혼수 상태에 빠진 사미르의 아내까지 얽히면서 세 사람은 과거의 업보에서 떠나지 못하고 끝내 비극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소통이 단절된 유리벽 사이의 남녀,  아마드와 마리의 재회

파르하디 감독은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도 놀라운 플롯 전개와 디테일한 연출을 보여주었는데요, 이 영화에서도 예의 수학 문제를 풀어나가는 듯한 촘촘한 이야기 구성과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연출력이 정말 놀랍습니다.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중간쯤에서 어느 정도 앞으로의 예상 견적이 나오는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서도 도대체 이야기가 어디까지 어느 방향으로 전개될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습니다. 


이 영화는 마치 계속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마리의 모습을 통해 그 실수가 의도치 않았더라도, 어떤 경로로 그 영향이 전파되어 나가고 각각의 인물들이 그 영향으로 비극에 다다르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영화 같습니다.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사정이 있기 때문에 누구도 온전히 옳은 선택을 하지 못했더라도 그 때문에 비난 받을 수 없지만, 결국 결과적으로 각자의 선택은 서로에게 어느 정도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이런 복잡 미묘한 상황과 아무도 비난할 수 없는 비극에 대한 평가를 관객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과거의 상흔이 진득하게 남아 현재의 인물들을 붙잡고 있는 모습은 마리가 새로운 결혼을 준비하며 집을 수리하는 모습을 통해 은유적으로도 나타납니다. 사미르는 집에서 페인트 칠을 해야 하는데 페인트 알레르기 때문에 언제나 눈물을 흘리고 있고, 아마다는 채 마르지 않은 페인트가 묻어서 자켓을 버립니다. 또 물이 새는 싱크대를 보고 마리는 언제나 물이 샜다 라는 말로 지금의 실수가 과거에도 반복되었음을 말합니다. 파르하디 감독은 전작에서처럼 집이라는 공간을 인물들 간의 관계에 메타포어로써 잘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예상치 않은 비극으로 상처받는 것은 이번에도 아이들

파르하디 감독은 평범할 수도 있는 드라마 장르의 영화의 플롯에 전형성을 제거하고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당위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관객이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탄식을 쏟아내며 평가를 포기하게까지 만드는 재능이 있는 거 같습니다. 이런 긴장감과 복잡함을 스릴러나 SF장르의 영화가 아닌 드라마 장르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은 장르 파괴로 해석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결국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그 모든 긴장감을 잊을만큼 어마어마하게 감정을 북받치게 만드는 피날레 장면을 준비고 있는데, 저는 이번에도 엔딩크레딧이 다 오를 때까지 그 충격으로 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과연 국내 배급사가 고른대로 모두가 떠났을가요 아니면 제 해석대로 모두가 머물렀을까요. 영화를 보고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별점: ★★★★

한줄평: 채 마르지 못한 페인트 처럼 과거의 상흔에 사로잡힌 사람들 간의 뒤엉킨 카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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