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적응'이 무엇인가에 관한 슬픈 고찰
약 3주간의 출장 일정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 사실 집은 집이지만 이 또한 애매하다. 9월말에 가족들이 왔을 때 집이었고, 추석 이후에 아이가 돌아가고 나자마자 다시 나는 10월11일부터 출장을 갔으니..
이곳이 내 집이었던 것은 불과 10일 정도일 뿐인 셈이다.
그렇지만 난 집으로 돌아왔고, 공교롭게도 돌아오는 날은 모두가 매년 노래해 마지 않는 10월의 마지막 날
집에 오는 것이 좋아 페북에 메시지도 간단히 남긴다. ^^
▼ 보통 오랜 출장을 다녀와서 집으로 돌아오면 가방을 팽개치고는 침대에 떡!! 눕는게 정석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고생을 했는데 뭘 또 챙기는가? 챙겨주는 누군가가 챙기려니 하면서 무조건 가방을 던지고는 떡!! 눕는다. 그게 지난 20여년간의 내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금 누가 그 가방을 챙긴다는 말인가? 가방을 챙겨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일 뿐이라는 나의 처지를 느끼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게다가 오랜 출장에 다녀오면 빨래가 한 가방이다. 이번에는 어느 정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 호텔 세탁을 이용했지만 그래도 빨래가 없을 수는 없다.
가기 전에 남겨둔 2-3피스의 세탁물과 함께 세탁기를 돌린다.
세탁기를 가동하고 나니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시간에 뭘 먹나? 시계는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비빔국수...
그게 먹고 싶었다.
냉장고를 여니 얼마전에 서울에서 가져온 김치가 있었고, 참기름, 고추장이 있었다.
설탕만 있으면 만들겠다 싶어 지하 편의점에 가서 설탕을 사온다.
김치를 쫑쫑 썰고
고추장, 설탕, 참기름을 넣어서 양념을 만든다.
국수를 삶아서 양념과 국수룰 버무린다.
▼ 누군가 이 비빔국수를 나에게 건냈다면 그것이 누구건 상관없이 나에게 욕 좀 들었을 것이다. 설탕은 미묘히 많이 들어갔고, 고추장은 적게 들어갔다. 국수는 너무 꼬들거리고, 김치는 이마트 김치다.
맛이 있을 턱이 없다.
게다가 스스로 만든 비빔국수...
그래도 출장의 피로때문인가 마파람에 게 눈이라도 감추듯 저 많은 국수를 다 먹는다.
▼ 세탁기에서는 헹굼 단계로 갔다는 소리가 띠링띠링 들린다.
맛나게 먹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적도의 이곳에 음식물 찌꺼기가 잠시라도 남아 있다면 그건 동네의 모든 생명체에게 이리 오라는 사인을 보내는 것과 같은 행위다.
먹자마자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를 마치니, 세탁기에서는 영화 스팅의 삽입곡, 'Entertainer'가 흘러 나온다.
물론 전자음이다. 이렇게 멋진 피아노 곡이 아니라 ㅎㅎ
https://youtu.be/Zd2sY8JZbjU
영화 '스팅'중 'The Entertainer'
영화 '스팅'중 'The Entertainer' 출처 : OBS 시네뮤직
www.youtube.com
세탁기에서 세탁물을 꺼내서는 건조대에 하나하나 널어 놓는다.
이제 대충 해야할 일이 끝났다.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무도 날 건드릴 사람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긴 하다. ㅎㅎㅎ
▼ 문득 무언가에 적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아이가 중학교 저학년일 때로 기억을 하는데 하루는 SIA라는 가수의 '샹들리에'라는 곡을 듣고 있길래 유심히 들은 적이 있다.
https://youtu.be/2vjPBrBU-TM
곡의 화자는 늘 파티를 즐기는 파티걸이고,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를 그저 좋을 때의 친구로만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파티에서 몸을 불사르며 놀겠다는 그런 내용이 담긴 곡이었다.
샹들리에를 타고 그를 그네 삼아 흔들며 놀겠다고 하니 도대체 얼마나 놀겠다는 말인가?
그러면서 참 요즘 애들은 이해하지 못할 곡을 좋다며 듣는구나 싶었던 기억이 난다.
▼ 최근에 잠이 안와서 보다가 발견한 영상 중에 Puddles Pity Party라는 광대가 있었다. America's got talent에 출연한 가수인데..
그가 부른 샹들리에는 나에게 매우 익숙한 곡이었다.
그러니까 이 가수는 샹들리에라는 곡을 내가 듣기에 익숙한 곡으로 만들어 부르는 그런 가수였던 거다.
나이든 광대의 얼굴을 한 그가 부르는 샹들리에는 내 귀에 쏙 들어오는 곡이었다는 말이다.
내 귀는 SIA라는 가수의 목소리에는 적응을 하지 못했지만 Puddles의 목소리에는 적응했던 것 아닐까는 생각을 해본다.
게다가 내가 광대기질이 있어서인지 나는 광대를 참 좋아하기도 하고 안쓰러워하기도 한다. ^^
그래서 더욱 그의 노랫가락을 이해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https://youtu.be/NFUZ5d_ukxc
▼ 긴 출장 끝에 집에 와서는 출장 가방을 정리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세탁기를 돌린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손수 맛없는 비빔국수를 만들어서는 배불리 먹는다.
이런 것도 적응의 축에 속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밤이다. ㅎㅎㅎ
그리고 이렇게 로맨틱하지 않은 10월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 것도 적응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적응이라는 것 참 쉽지 않은 것인 것 같다.
그치만 그간 3주일 동안 미얀마에 적응해서 그런지 이곳에서는 쉽게 적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한다.
아직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집이란 늘 그곳에 있는 움직이지 않는 곳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느끼며 버스 정류장으로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By 켄 in 싱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