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만 하는 그 작업실 아니에요~
몇 달 전 TV 프로그램 '온앤오프'에 배우 고아성이 떴다. 영화 홍보를 위해 공개한 그의 일상에서 단연 화제가 된 것은 바로 작업실이다. 일명 ‘시간과 정신의 방’으로 불리는 그 공간은 개인 고아성만의 취향을 듬뿍 반영함과 동시에 배우로서의 그의 프로 정신을 보여주었다. 배우 전용 연습실의 부재와 가족과 함께 사는 집 사이에서 여러 장소를 전전하다 5년 전에 만들었다는 이 작업실. 고아성의 작업실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바로, 이 사례가 지금 시대에 어울리는 반독립 형태와 직업 생태계의 새로운 실마리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이 작업실을 보고 ‘유명한 배우는 돈 많이 벌어서 보여주기 식 작업실 차릴 수 있지 않아?’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 본인만의 색깔로 꾸며진 공간에서 그는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입식을 고집하고 참여한 영화를 기념하는 소품들을 모아 특별한 포트폴리오를 완성한다. 이 공간의 주목적은 대본 리딩으로 배우 동료들은 미리 예약하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자체 규칙에 의해 운영된다. 경우에 따라 일종의 코워킹 스페이스도 되는 셈이다.
기존 작업실 vs. 요즘 작업실
물론 작업실은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작업실은 특수한 환경이 요구되는 계열의 워크숍이나 분리된 공간을 활용하는 예술 계통이 주를 이루었다. 베이킹 스튜디오, 도자기 공방, 음악 작업실 등이 포함된다. 혹은 작업을 전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골방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출판계의 큰 소설가나 인정받은 그림작가를 위한 공간이라고 할까.
그러나 요즘 작업실은 개념이 바뀌었다. 전업 작가들의 개인 전유물 같던 작업실이 더욱 대중화되면서 변화하고 있다.
“요즘 평생직장이 어디 있어?”
“직장에서는 자아실현하는 거 아니야!”
직장인들 사이에서 흔히 오가는 대사다. 뼈를 묻겠다는 충성심으로 회사를 다니던 시절이 지고, 적당히 생계를 유지하면서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워너비 인생으로 꼽힌다. 그들은 진지한 취미생활의 시작으로 자기 콘텐츠를 쌓는 것에 몰두한다. 그 활동으로 금전적 수익까지 만들 수 있다면 금상첨화. 부업 뿐 아니라 N잡이 뜨는 이유이다. 아무리 어디서든 일 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해도 책상에 의자는 필요하고 사람마다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이 다르다 보니 오늘날 작업실은 N잡러의 베이스캠프가 되고 작업 살롱으로 다시 태어난다.
왜 하필 지금 작업실일까?
이전에는 본업 외 활동 공간으로 카페나 코워킹 스페이스 선호도가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출현 이후 사람들은 실내에 모이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열린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영감을 얻고 혁신을 만드는 장소로 여겨졌던 개방형 사무실은 이제 바이러스까지 공유하게 된 것. 그렇게 갈 곳 잃은 사람들 중 장기적인 계획이 있는 몇몇은 개인 작업실을 갖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한 오프라인의 약세로 소비되지 못하는 공간이 증가하는게 작업실 사냥을 나서는 이들에겐 호재로 작용하기도 한다. 작업실은 상권들과 달리 접근성이 떨어져도 싼 월세가 유리하고 주거에 비해서는 조건이 까다롭지 않아 지하든 옥탑이든 저자본으로 시도가 가능하다. 번쩍번쩍하게 단장해서 다수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각자의 속도와 취향에 따라서 구색을 맞춰가는 맛도 있다.
젊음의 거리 홍대의 시발점과 요즘 을지로가 ‘힙지로’로 뜰 수 있었던 이유는 작업실이다. 다양한 작업을 진행할 때 재료나 시설 접근이 용이했던 홍대는 작업실 후보지로 각광을 받았었고 예술가들과 학생들이 모여들면서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을지로는 60-70년대 공구 매장과 인쇄소가 모여있던 지역으로 역시 자재를 찾아, 의뢰하러 이곳을 드나들던 젊은 예술가들이 아예 하나 둘 작업실을 차리고 상권이 따라오면서 힙한 분위기로 재탄생했다. 뉴트로 유행을 타고 2-3년 전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한 지역이다. 일단 인프라가 갖춰지면 세가 비싸지기 마련, 개척 주역이었던 작업실 주인들이 떠나게 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기도 한다.
요즘 작업실에서 벌어지는 일
공간으로써 기능을 하던 작업실은 이제 그 자체로 하나의 콘텐츠가 되고 있다. MZ세대는 구매할 때 상품만 보지 않는다. 특히 취향 소비 경향이 강한 이들은 상품이 어떻게 제작되고 고객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궁금해한다. 얼리어답터나 트렌드세터일수록 남들에게 보이는 일상을 아무거나로 채우지 않는다. 이들에게 작업실 콘텐츠는 각 브랜드, 작가, 프리랜서의 작업 아카이브로 소비되고 구매하는 가치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이유가 된다.
인스타그램에 올라가는 작업실은 한 공간이 다양하게 기능하는 모습이다. 해당 스케줄을 실시간으로 업로드하며 꾸준히 작업을 노출시키고 잠재적 소비자의 취향을 저격한다. 주중 일정 시간에는 클래스, 토요일에는 쇼룸, 그 외에는 제품을 제작하는 작업실로 사용되는 도자 작업 그룹 브라이트 룸은 용도에 따라 주택 내부의 모습이 때때로 바뀐다. 타 편집샵이나 온라인에도 입고되어 있지만, 실물이 궁금하거나 브랜드 분위기를 느끼고 싶은 팬들이 접하기 좋은 구심점이 존재하는 셈. 서울숲에 위치한 '선과 선분 도자 스튜디오'는 최근 '담비의 차실'과 함께 팝업 티룸을 진행했다. '담비의 차'와 '선과 선분의 도자기 잔'은 조화롭고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며 많은 관심과 응원을 받았다. 정체성이 드러나는 장소에서 콜라보를 기획하고 오픈 스튜디오 형식의 행사에서 사람들과 만나는 사례로 요즘 작업실의 다양한 기능이 잘 드러난다.
본업과 별개로 작업실을 운영하는 경우에는 초보 작업러가 초기부터 그 비용을 작업물만으로 메꾸기 쉽지 않은데 공간의 공백 시간까지도 알뜰하게 또 다른 파이프에 연결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들과 다르게 꾸린 특별한 공간을 일시적으로 대여해주거나, 콘텐츠를 활용해 호스트로서 일회성 모임을 기획하는 방법을 활용한다. 공간을 매개로 하는 여행 플랫폼 '남의집'은 지극히 사적인 개인의 장소를 타인과 연결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즈니스로 작업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도전해볼 만하다.
작업실을 배경으로 브이로그를 올리는 프리랜서, 브랜드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모베러웍스'의 'MoTV'는 브랜드 창업기를 착실히 기록하며 실제 결과물이 나오기 전부터 주목을 끌었다. 꾸준히 타 기업과 콜라보하는 영상, 인터뷰 영상 등을 창업자들이 활동하는 공간에서 촬영하면서 그들의 방향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객 되었다. 세라믹 주얼리 브랜드 '돌'은 유튜브 자체 조회수나 구독자는 미미하지만 수작업 과정을 영상으로 공개하자 고객 불만과 문의가 줄어드는 효과를 보았다. 공업품과 다른 특성을 보고 난 고객들이 브랜드의 진정성을 믿게 되고 그 과정에서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작업실이 단순히 콘텐츠의 배경이나 제목으로 차용된 경우도 있다. 서재 겸 작업실 겸 유투브 배경인 곳에서 번역가 '서메리'는 영상을 제작한다. 성공한 책덕인 그의 서재는 구독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날카롭게 꽂혀있는 책을 스캔한 팬들을 위해 관련 영상을 따로 제작되기도 했다. 적재가 진행하는 네이버 나우 방송 ‘야간 작업실’은 뮤지션으로서 모습을 강조한 콘텐츠로 팬들이 그의 신곡을 가장 빨리 만나는 채널이 되었다.
작업실 콘텐츠 잘 팔리는 이유, 왜?
왜 사람들은 이렇게 작업실 콘텐츠에 흥미를 보일까? 그 답 중 하나는 이미 요즘 작업실의 시작과 닿아있다. 평생직장이 없어지고 N잡러, 이직이 흔해진 시대에 사람들은 남의 직업이 너무 궁금하다. 최근 코로나로 형식이 바뀐 프로그램 유퀴즈는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 섭외에 진심이다. 특수 청소 전문가, 수화 통역사, 관제사, 프로야구선수 FA 에이전트까지 낯설고도 흥미로운 사람들과 만나며 그들의 직업이야기와 일상을 전해 듣는다. 실제 직업 현장에 찾아갈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주변에서 보고 지나쳤던 당연한 일, 제품, 시스템이 유지되는 비하인드를 재미있게 소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있다. 작업실 콘텐츠처럼 관심사와 적성에 맞는 또 다른 일과 취미를 찾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다.
작업실 = 노동문화 트렌드
작업실 = 일하는 크루의 확산
작업실 = 새로운 독립의 형태
지금 불고 있는 작업실 바람은 단순히 공간에 대한 니즈가 아니다. 이 시대의 새로운 노동문화의 트렌드가 녹아있는 하나의 현상이다. 안정된 평생직장은 빠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에 유니콘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다양한 관심사와 원하는 직무를 향해서 끊임없이 탐구하는 세대에게 작업실이라는 콘텐츠로 느슨하게 연결된 집합은 서로에게 영감과 용기를 준다. 때때로 그 콘텐츠는 세상에서 가장 시너지가 넘치는 협업을 성사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생겨나는 각양각색의 작업실은 경제활동의 주체로서의 독립과 늦어지는 주거 독립의 대안이 된다.
가지 공장 한 줄 평
하나의 공간, 다양한 기능! 새로운 노동문화의 트렌드는 작업실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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