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이십 대 초반까지는 '보이는 것'이 진로 선택의 기준이었다. 보이는 것으로만 판타지를 만들고, 그 판타지 속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나라는 인간이 지속 가능하게 그 일을 할 수 있는가'였다.
정말 오래된 이야기 같지만, TV나 신문 혹은 잡지 등의 전통 매체가 강력했던 때가 있었다. 유튜브, 블로그, SNS 등장 이전의 시기다. 그 시대 속에서 자라온 나에게는 패션 잡지 기자라는 직업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내가 재미있게 열정을 뿜어낼 수 있을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흥미, 관심, 재미가 직업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해맑은 시기였다.
그때 그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정식 기자는 아니지만 객원 기자 혹은 어시스턴트로서, 원하는 목표의 언저리, 어쩌면 그 길을 위한 징검다리로서의 기회가 주어졌었다.
막내였기 때문에, 주된 업무들은 당연히 선배 기자들의 업무를 돕는 것이었다. 한 달을 주기로, 여러 기사와 화보라는 결과물을 내기 위한 준비와 진행 과정을 서포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품 촬영이나 장소 취재 등을 독자적으로 할 수 있었고, 중요도가 적은 기사들이어도 내 이름으로 꼭지가 한두 개씩 주어지기도 했다. 가끔 미용실에서 옆자리 손님이 내 자식 같은 기사를 읽는 것을 보면, 그렇게 기분 좋고 뿌듯할 수 없었다. 제대로 안 읽고 휙 넘기는 사람들이 있으면, 다시 꼼꼼하게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그 뿐인가? 멋진 모델, 배우, 유명인들도 실제로 볼 수 있었고, 다양한 멋진 행사에 참석도 해볼 수 있었다. 특이하고 맛난 것들도 많이 먹어 보고 멋진 곳도 구경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나로서는 듣도 보도 못 했던 첨단의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매일매일이 흥미로웠다. 늘 강한 자극이 있었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자극은 항상 신선할 수 없다. 조금씩 자극에 무뎌질 때가 온다. 실망도 생긴다. 초심은 슬그머니 사라진다. 겉에서 볼 때와 안에서 있을 때의 괴리는 어디서나 존재한다. 당시 패션이나 미디어에 관심 있는 여대생들의 선망 직업 중 하나가 패션 잡지 기자였다. 친구도 이 언저리에서 일하는 나를 부러워했다. 왜일까? 한마디로, 보이는 것이 선택의 기준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막상 했을 때 다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막상'이라는 단어는 언제든지 틈을 비집고, 열정을 갉아먹는다. '막상'의 이유는 다양하다. 예상과 다른 업무, 열악한 근무 환경, 만족지 못한 보상, 건강의 악 신호, 어쩌면 의지의 변화일 수도 있다.
그때 나에게 이 모든 것들이 이유였지만, 제일 큰 부분은 균형이 깨져가는 생활이었다. 업무적 재미가 기본적인 생활 보장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내 시간인데, 내 시간이 아닌 삶은 정말 힘들었다. 주말, 휴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인과의 소소한 약속을 잡는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신중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또한, 마감 시기 때마다 밤늦게 택시를 타고 귀가하는 불안한 마음들은 열정 루팡의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사실, 선배들이 먼저 가라고 배려해 주셔서 그나마 내가 제일 일찍 퇴근했었다. 선배들 같은 삶을 몇 년이상 하기에는 두려웠다. 제대로 경험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 때까지의 경험들조차도 나에게는 점점 감당이 안 되고 있었다. '남들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쉴 수 있는 직업이 최고'라는 누군가의 명언이 나의 머리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 깨달은 점은 나는 또 나에 대해서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 내 예상과 달리 나는 이곳과 어울리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센스 또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이 패션, 뷰티, 잘나고 잘난 사람들을 보고 있어도 별 감흥이 없다는 것은, 이 분야에서 일할만한 재목이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일 자체는 빠릿빠릿하고 성실하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쪽 특유의 재능은 없었던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선배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패션 관련 해외 대학을 나왔고, 어릴 적부터 풍요로운 환경에서 다채롭고 감각적인 경험을 하고 자란 자들이었다. 셀프 주눅이 들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일의 의미와 목적이다. 이쪽 일의 목적은 결국 소비를 장려하는 것이다. 소비가 있어야 경제가 도니까, 소비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게다가 내 전공 또한 광고 아닌가! 하지만, 값비싼 옷과 화장, 액세서리들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보이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산업에서 크게 혹은 작게 각각의 자리를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역설적으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이 역시 내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슬퍼 보이기도 했다. 갑자기 무소유 주의자가 된 것도 아니고, NGO에 들어갈 만큼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 자체가 나쁘다 선하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이 속에서 더 배우고 공부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내가 그 분야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고 싶은 일들'은 그렇게 '하기 벅찬 일'들로 퇴색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때 그 시절을 사랑한다. 전보다 더 나란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나에게 지속 가능한 가치가 무엇인지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는 것은 정말 소중한 교훈이었다.
그럼에도, 선택을 할 때 우리는 보이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지불하고 경험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