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남부로부터의 초대
내가 죽어야 한다면 이곳의 태양 아래이기를
파리로 다시 돌아오기 전에 우연히 서촌의 한 책방에서 만난 책이 나를 이곳, 남프랑스로 데려다 주었다.
부제가 "빛과 매혹의 남부"인 그 책은 프랑스에서 6년을 살고도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프랑스의 곳곳을 보여주었고, 꿈꾸게 했다.
프랑스는 지역에 따라 무한히 다양한 색채와 매력을 가진 나라다. 동서남북으로 대서양과 지중해에 맞닿는 광활한 면적을 지닌 유럽의 중심국답게 같은 나라지만 각 지방마다 특유의 분위기, 문화, 빛과 색깔이 있다. 하물며 그 좁은 파리조차도 골목 몇 개만 지나가면 각 구별로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그 중에서도 남프랑스는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문인들과 예술가, 여행가들에게 격찬을 받아 온 빛과 매혹의 지방이다. 남프랑스의 햇살, 공기, 색채는 분명 다른 지방의 그것들과는 다르다.
프랑스로 돌아오면 꼭 남프랑스에 가리라, 결심하고 왔지만 이렇게 빨리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남부 동행글이 올라왔고, 갑작스러웠지만 여러 조건들이 좋아 같이 가기로 했다가 그 사람은 정작 가지 않고 나 혼자 가게 되었다. 떠나기 전날 저녁에 가기로 결정하고 다음날 첫차 기차표를 끊었고, 밤을 새며 새벽 내내 짐을 쌌다. 그렇게 조금 갑작스럽지만 그래서 더 설레면서, 나는 남프랑스의 엑상 프로방스(Aix-en-Provence)에 발을 디뎠다.
Aix는 물이요 Provence는 프랑스 남부의 한 지역을 일컫는 지역명으로, 그 유명한 프로방스다. 그러니까 프로방스의 물이라는 뜻인데, 그래서 엑상프로방스는 도시 전역에 43개의 분수가 있고(마음 좋은 에어비앤비 주인 할아버지가 알려주셨다) 로마 시대부터 내려온 온천탕이 있는 '물의 도시'다.
파리 리옹 역에서 3시간 남짓 달려온 기차에서 본 바깥 풍경은 지금까지 프랑스를 다니며 본 풍경과 사뭇 달랐다. 동부나 서부, 북부로 갈 때는 차를 타든 기차를 타든 그저 끝없이 펼쳐진 평야가 전부였는데, 남부가 점점 다가들어 올수록 예상치 못한 산맥과 절벽, 돌산이 나타났다. 뭐지, 이 낯선 풍경은? 프랑스에도 이런 산들이 있었나? 기차 창밖으로 보이는 산맥 풍경은 우리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줄 알았다. 엑상프로방스 역에 도착해서 플랫폼에 첫 발을 내디딜 때, 설렘과 전율이 살짝 흘렀다.
엑상프로방스 TGV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러 가자, 기사분이 'Aix로 가요?'하고 묻는다. 여기서는 엑상프로방스를 Aix(엑스)라고 한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피어 있는 보랏빛과 햐얀색이 섞인, 남부 프로방스의 감성이 가득 담긴 여리여리한 꽃들이 내가 남프랑스에 있다는 실감을 서서히 올려주었다. 엑상프로방스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전화부터 헀다. 전날 급하게 숙소를 알아보면서 에어비앤비 여러 곳을 시도했지만 너무 임박한 나머지 몇 곳으로부터 취소를 당했는데, 기적적으로 새벽 3시경 엑상프로방스 시내 중심에 있는 예쁜 스튜디오의 주인 할머니가 예약을 받아주었다. 할머니는 전화 너머로 미라보 광장에 있는 'Café du Roi René'로 가서 'Moirand'이라는 사람을 찾으라고 했다. 심지어 카페의 주소도 모르셨다...
도착하자마자 난데없이 떨어진 미션에 일단 캐리어를 끌고 시내 중심부로 향했다. 가는 길에 관광안내소에 들러 야무지게 도시 안내지도도 챙겼다. 바로 옆에는 엑상프로방스의 중심인 La Rotonde, 로통드 분수에서 남부의 태양 아래 찬란하게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오른쪽으로 쭉 뻗어 있는 대로가 엑상프로방스의 샹젤리제 거리라고 불리는 미라보 광장 거리다. 오늘이 장날인지 대로를 따라 노점상들이 쭉 늘어서 있었고, 거리 양쪽으로 남부 특유의 시원한 연둣빛 나뭇잎을 7겹 한복 치마처럼 풍성하게 피워낸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광장 끝까지 가니 Roi René라고 써진 카페가 보였다. 하지만 주인에게 물어봐도 그런 사람은 모르겠단다. 할 수 없이 다시 전화를 하니, 할머니의 남편이 되시는 것 같은 할아버지에게서 곧 가겠다는 전화가 왔다. 캐리어를 놓고 에스프레소 알롱제 한 잔을 시켰다. 남부의 햇살이 푸른 나뭇잎 잎사귀를 통과해 미라보 광장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저 아름다운, 남프랑스였다. 이곳에는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져도 모든 것을 미화시켜버리는 힘이 있다.
조금 기다리자 할아버지 한 분이 살짝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오셨다.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팔꿈치로 인사를 나눴다. 에어비앤비 숙소는 미라보 광장 거리 끝 바로 안쪽에 있었다. 젊은 시절 한국과 북한에 다니며 취재를 하셨다는 기자 출신의 할아버지는 은퇴를 하시고 부부가 함께 에어비앤비 여러 곳을 운영하며 엑상프로방스에서 노년을 보내고 게셨다. 숙소는 창가에서 시내 거리와 교회가 내려다보이고, 예쁜 화장대가 있는 화장실이 딸린 독립된 스위트룸 형식의 방이었다.
나는 남프랑스의 햇살과 색채를 닮은 노란 원피스로 갈아입고 본격적으로 엑상프로방스의 거리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