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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Dec 27. 2023

만사를 나눌 때

총살형을 할 때의 얘기다. 집행인은 자신이 든 총에 실탄이 들어 있는지 공포탄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누구의 총에 죽었는지 알 수 없게 하여 집행인의 죄책감을 덜고자 하는 의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에 대한 필자의 의심은 공리주의에서 비롯한 것으로서, 각 개인의 죄책감은 덜 수 있을지언정 그 합은 더 커지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특정 집행인이 사형수를 죽음으로 이끌었을 가능성은 1보다 작았겠지만 0보다는 크다. 살인행위가 가지는 도덕적 무거움을 감안한다면 그 확률이 1보다 작다는 사실보다 0보다 크다는 사실이 마음에 더 와닿을 공산이 크다. 따라서 1보다 작다는 사실이 주는 위로가 그다지 크지 않아서, 모든 집행인의 죄책감을 단순합해도 한 명이 죄책감을 뒤집어쓰는 것보다 클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방식을 쓰는가? 추측건대, 감정은 완전한 전이가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감정이 일부분 타인에게 옮을 수는 있어도 완벽히 같은 양 같은 느낌으로 옮겨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로 여러 사람들의 감정합을 구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고, 각 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들여다보는 것이 전부이다. 죄책감이라는 큰 감정을 쪼개 각 개인에게 심어놓는다면, 그 감정을 모두 합한 게 전보다는 좀 불어날 수 있어도(물론 감정합이 의미가 없기는 하다), 감당하는 사람들이 이겨낼 수 있는 범위 안이라면 사회가 능히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법은 세상 곳곳에서 발견된다. 거대한 일을 여럿이 수행하다 보면 군더더기가 이리저리 엉겨붙는다. 그럼에도 이렇게 수행하는 이유는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이 시간의 측면에서 비효율적이고, 때로는 그의 고생을 동정하며, 무엇보다 각자의 고생이 감당 가능한 까닭이다.


효율만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다면 각자의 능력을 파악해 최대로 부담할 수 있는 만큼 배분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자기도 자기 능력을 모르는데 남이라고 이를 똑바로 알 리 만무하다. 이는 결국 모두의 노력이 요구되는 것으로서 자신의 강약점을 파악해 진솔히 알리고, 또 이것저것 시켜보면서 알아볼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일이나 사람 맞이하는 자리를 애써 겁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나에게 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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