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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May 12. 2024

괴물(관념)

평화로운 오후, 바람이 솔솔 불고 구름이 적당히 끼어서 강한 햇빛도 둥글게 뭉개주는 시간. 느닷없이 호수에서 괴물(관념)이 나타나 사람들 속을 잡아먹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가족과 연인의 손을 붙잡고 호수에서 멀어지려 했으나, 괴물(관념)의 속도는 빛보다도 빨라서... 모두가 그의 포로가 됐다.


공권력도 힘을 쓰지 못 했다. 일찍이 도착한 경찰관들이며, 뒤이어 투입된 군인들까지 겁에 질려 다가가지 못 다. 심지어 중계차 현장을 방문한 카메라를 통해 괴물(관념)이 방송을 타면서, 일부 청자들도 마음을 잃고 마는 상황까지 번지게 되었다. 범국가적 의식의 위기였다.


그는 정의되기 나름이었다. 누군가에겐 어린 나이에 흔히 겁내는 털복숭이 벌레와 같았고, 누군가에겐 정신적 트라우마를 안겨준 옛 경험과 같았다. 피해자 수만큼 괴물(관념)이 존재하는 셈이었으니 마땅한 대응책을 내지 못 했다. 괴물(관념)은 각자에게 내장된 블랙홀이었다.


그러나 흔하지 않게, 아니 꽤나 상당히도... 그에 면역인 자들이 있었다. 병을 앓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괴물(자신)이나 괴물(타인) 내지는 괴물(사회)로부터 끔찍이도 시달려 한낱 호수 괴물(관념)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마음의 적을 견뎌온 그들은 이리저리 노하우를 주었다. 자신을 탓하지 말고, 약을 꼬박꼬박 먹고, 어떻게든 사회생활을 이어나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대 들키지 말고.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고통을 겪으면서 속으로만 끙끙거렸다. 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튀어나온 괴물(관념)을 도리어 몸 속 깊은 곳으로 처박았다. 상처는 끊임없이 벌어졌고, 고통을 버티지 못 한 일부는 결국 잡아먹히고 말았다. 반면 대다수는 온몸을 꽁꽁 싸맨 채 살아남았고, 이윽고 상처를 드러낸 이들을 약자라고 비난했다. 악자는 분명 괴물(관념)이었는데 말이.


소용돌이 같았던 그날을 두고 해석이 빈번하다. 누군가에겐 현재진행형인 일이라서 더욱 그렇다. 지금은 멀쩡해보이는 자일지라도 괴물(관념)의 씨앗들은 숨죽인 채 시기를 기다린다더라. 그때 맞설 우리의 무기는... 여전히 아픈 자들의 또 다른 경험이어야 할지.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또 각 개인의 희생과 처치를 기다려야만 할지. 괴물(관념)을 꺼내 이야기하고 하나로 뭉쳐 함께 무찌를 수는 없을지. 호수를 조심스레 산책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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