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록시마 프로젝트>
곰곰이 한번 생각해봐.
너는 곧 우주로 떠나야 하는 우주 비행사야. 우주선에 가지고 탈 수 있는 물건들은 종류와 무게가 모두 제한되어 있고, 아주 개인적인 물품은 1.5kg만 실을 수 있어.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가겠니?
지구에 있는 가족들이 그리울 때마다 꺼내볼 사진은 어떨까.
아가 적부터 끌어안고 자던 작은 이불을 꼭 가져가고 싶겠지만, 아마도 어려울 것 같구나.
네가 사랑하는 물개 인형과 친구들이랑 나누어 가진 우정팔찌.
밖에서 하도 갖고 놀아서 가죽이 다 벗겨져가는 축구공과 네가 열렬히 응원하는 토트넘의 손흥민 유니폼.
하루라도 안 먹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초콜릿 비스킷을 가져가고 싶진 않을까?
한국에 돌아갈 준비 때문에 가져갈 것과 버릴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요즘의 너를 보며 문득 이런 것들이 궁금해졌지.
뜬금없는 질문은 아니란다. 며칠 전 엄마가 보았던 <프록시마 프로젝트>에는 실제로 이런 장면이 등장하거든. '프록시마'라는 낯선 제목은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인 '프록시마 센터우리'에서 온 것 같아. 몇 년 전에 세계의 천문학자들이 지금까지 발견된 외계 행성 중에 태양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프록시마 b'를 관측했다고 발표했는데, 이것은 표면에 물이 있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어쩌면 생명이 살 수도 있대.
그래, 영화의 제목인 <프록시마 프로젝트>는 이곳에 가기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우주비행사들에 대한 이야기야.
우주비행사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너는 분명히 '닐 암스트롱'을 떠올리겠지? 작년에 그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아이엠 스트롱?!'하면서 그의 이름을 외우던 네 모습이 생각났거든. 달에 처음으로 다녀온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 둘 다 참 대단하고 멋지다고 얘기했었지.
그런데 그런 대단한 영웅이 바로 너의 엄마라면 어떨 것 같아? 물론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우주비행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한번 상상해봐. 이 영화에는 여덟 살짜리 '스텔라'라는 소녀가 나오는데 그 아이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우주비행사로 뽑혀서 우주에 가게 된 거야. 6개월 정도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스텔라는 한동안 만난 적이 없는 아빠에게 맡겨지게 돼. 낯선 환경, 낯선 학교, 그리고 엄마가 없는 곳에서 지내야 하는 어린 소녀의 막막한 마음을, 열 살인 너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구와 가장 가까운 항성이라고는 하지만 프록시마와 지구와의 실제 그 거리는 4.22 광년, 즉 40조 km래. 글쎄, 숫자와 과학에 약한 엄마는 그 거리와 시간이 얼마나 멀고 긴지 헤아려지지 않는구나.
우주로 떠나기 전 스텔라의 엄마 '사라'는 러시아에서 3주 동안의 고된 훈련을 받게 돼. 우주에 간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서 매일 15km 이상을 달리는 훈련은 기본이고, 물속에서도 불 속에서도 공기가 없거나 빠르게 계속 빙빙 돌아가는 우주선 속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만큼 강한 체력과 정신이 필요하거든.
이미 우주로 떠나서 대단한 활약을 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그린 SF영화는 그동안 참 많이도 봤지만, 우주로 떠나기 전에 실제로 비행사들이 어떤 훈련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이 영화는 그런 과정을 참 자세히 보여주고 있어서 더 흥미진진했어. 특히나 남자 비행사들이 대부분인 곳에서 여성이자 엄마인 사라가 얼마나 악착같이 노력하는지 참 생생하게 알 수 있었지.
우주비행사라고 해서 태어날 때부터 슈퍼 영웅이거나 피도 눈물도 없는 철인은 아니었어. 눈에 밟히는 두 아들과 아내가 있는 아빠이기도 하고,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연로하신 엄마의 아들이기도 하고, 하나밖에 없는 어린 딸을 둔 엄마이기도 했지. 그들도 모두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하고 따뜻한 사람들이었어.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스텔라는 그럭저럭 아빠와 새 학교에 적응해가지만, 정작 더 힘들어하는 사람은 딸을 보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엄마야. '분리불안'이라는 말 들어봤니? 맨 처음 네가 어린이집에 갔을 때 문 앞에서 엄마와 '바이 바이'하며 헤어지고 나서도 엄마가 보고 싶고 집에 가고 싶다고 한동안 울어댄 적이 있었잖아. 그렇게 처음 엄마와 떨어지게 되면 누구나 겪는 고통이고 아픔이 바로 분리불안이지.
하지만 그 분리불안을 아이들만 겪는 것은 아니야. 지금에 와서 고백하자면, 엄마와 아빠도 처음 너와 오빠를 어린이집에 보낸 날이나, 아일랜드에 와서 낯선 학교에 처음 학교에 등교시킨 후에 초조하고 괴로워서 아무것도 제대로 못했단다. 그런데 3주, 그리고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여덟 살 딸과 헤어져야 한다고 상상해보면 고난도의 훈련만큼이나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어렸을 때 너의 외할아버지, 즉 엄마의 아빠와 참 오랜 시간을 떨어져 지냈어. 지금은 인터넷이 있어서 세계 어느 나라에 있든지 영상통화도 할 수 있고 문자로 나눌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다른 나라에 있는 사람과 전화통화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편지를 쓰고 우체국에 가서 보내는 것이 전부였거든. 외국에 몇 년씩 나가 있는 아빠는, 마치 지금으로 치면 닿을 수 없는 저 광활한 우주에 있는 것과 비슷했던 것 같아.
해마다 쑥쑥 자라는 우리 삼 남매의 사진을 찍어서 사진관에서 현상하고, 셋이서 열심히 연필로 쓴 편지를 모아 편지봉투에 꼬깃꼬깃 접어 넣곤 했지. 그렇게 편지나 소포를 보내고 나면 아빠가 계신 곳까지 편지가 도착하는 데 여러 날, 그리고 다시 아빠가 쓴 답장이 우리에게 돌아오는데 여러 날이 걸렸어. 생각해보니 그곳은 우주보다 던 먼 곳이었던 것 같아.
그때는 아빠 얼굴을 잊을 것 같아서 속상하고, 혼자 우리를 돌보는 엄마가 참 안쓰러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가족과 떨어져서 홀로 지내야 하는 아빠는 얼마나 우리가 그립고 힘들었을까 싶어. 아마도 우리가 보낸 편지를 읽고 또 읽고, 사진이 닳도록 어루만지지 않았을까.
내가 만일 영화 속의 사라라면, 그 옛날의 외할아버지였다면 무엇을 가져갔을까. 솔직히 선택하기 너무나 힘들 것 같아. 가져가고 싶은 것이 많아서 고민이 되다가도, 한편으로는 그런 것들이 또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고. 무엇을 넣더라도 그 속에 담긴 추억들이 1.5kg을 훌쩍 넘길 만큼 무겁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일 테지.
지난주 네 친구 티아가 할머니 장례식에 다녀온 날 저녁에 네가 나에게 물었지.
"엄마는 언제 세상을 떠날 것 같아?"
아마 10년 전쯤이었다면 껄껄 웃어넘겼을 질문일 텐데 이상하게도 이제는 그렇게 되질 않더라.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와서 조금 무섭기까지 했지. 이미 나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영영 헤어진 경험이 있고, 내 주변에는 나보다 젊은 데도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있으니 이제 내가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난다 해도 그렇게 이상한 일을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어.
아무리 먼 미래를 떠올려봐도, 내가 절대 볼 수 없고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 뭔 줄 아니?
그건 네가 할머니가 되는 모습이야. 넌 엄마의 어릴 적 모습을 사진으로라도 볼 수 있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오래 살아도 네 인생의 반 정도밖에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당연한 섭리인 거지. 아니, 그것만으로도 매우 감사하고 행운일지 몰라.
언제부턴가 중력이 더 강하게 느껴지고 이 현실, 지구를 뜨는 일이 참 쉽지 않겠다고 여겨진 건, 아마도 너희들이 태어나고 너무 많은 추억들이 생겨났기 때문일 거야. 그렇게 보태진 무게들이 자꾸 손에 무언가를 더 쥐고 싶게 만들고 손에 쥔 것은 더 놓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아.
어릴 적부터 우주비행사가 되기를 그토록 열망하고 드디어 그 꿈을 눈앞에 둔 사라가 자꾸만 약해지고 가끔은 중력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주저앉아 우는 이유를 나는 알 것 같았어. 비록 지금은 우주로 단 6개월만 헤어질 테지만, 언젠가는 지구가 아닌 현실을 떠나 스텔라와 헤어지게 되리란 건 알고 있었으니까. 우주비행은 그것을 위한 작은 예행연습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 거지.
이 영화에는 끝날 때까지 광활한 우주가 나오지 않아. 하지만 엄마가 나를 두고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스텔라에게는 SF 영화 이상의 비현실적인 상황이 주어진 것과 비슷해. 하지만 참 기특하게도 아이들은 강해. 내가 너와 오빠를 보면서도 항상 느끼는 것처럼 엄마, 아빠의 힘과 노력이 아니라, 너희들 속에 잠재된 가능성과 자생력으로 쑥쑥 커가는 모습은 참 신기해.
드디어 사라를 태운 우주선이 이륙하는 날, 비행사들의 가족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있는 우주선을 바라보며 서있지. 모두들 그렁그렁 눈물 맺힌 눈으로 가슴을 졸이고 있는 가운데 나는 똑똑히 보았어. 그 누구보다도 담담하고 씩씩하게 하늘과 마주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우주비행사이자, 한 여성이자, 엄마인 사라를 응원하는 스텔라는 처음보다 성큼 자라서 현실과 당당히 마주하고 있었지. 어느새 분리불안을 극복한 모녀의 멋진 모습에 나는 마음속으로 열띤 박수를 보냈단다. 그리고 그 모습이 훗날 우리 모녀의 모습이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어.
언제일지 모르지만 말이야, 언젠가 우리가 헤어지게 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분리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준비를 해놓는 건 어떨까.
너에게 남기고 싶은, 그리고 나를 기억하고 싶은 물건들을 위한 상자를 만들어 놓기로 하자. 그리고 정말 의미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담아두는 거지.
P.S.
다만, 이별이 너무 무겁진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