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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lum Jan 28. 2024

망한 소개팅의 사이드 이펙트 2

몸의 사유 # 에피소드 2

"언니 소개팅할래? 할 거지? 무조건 해."


소개팅을 하라며 5분 간격으로 할 마음이 있으면 빨리 응답하라는 H의 다급해 보이는 카톡이 여러 개 와 있었다.

상대방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이 무조건 소개팅을 하라는 H의 권유에, 그녀가 얼마나 나의 연애를 바라고 있는지, 그녀의 절실함(?)이 너무도 잘 느껴졌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방과의 소개팅을 좋다고 덥석 승낙할 일도 아니었다. 나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고 H와는 어떤 사이인지 물었다.

상대방은 H의 회사 동료의 친구의 같은 회사 동료라고 했다. H도 누군지 잘 모른다는 얘기였다.

H가 아는 정보는 그가 우리와 대학 동문이라는 것과 그의 나이, 지금 한 중견 언론사에 다니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취지의 성격 묘사 몇 가지 정도였다.


"이 정도 회사면 괜찮지 않아? 언니 무조건 해 무조건."


회사 타이틀을 두고서 내게 밑질 것 없는 장사라는 듯이 말하는 H에게 고마움보다는 약간 성가신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H는 그런 의도 없이, 다만 그게 어떤 기회일지라도 내가 잡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갖고 있는 속물적인 생각 + 현재 백수라는 자격지심이 발동해서 혼자서 기분이 언짢아지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이 물고 온 이 드문 만남의 기회를 어떻게든 성사시키려는 흥분에 휩싸인 H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 사진 교환을 안 하는 거라는데 괜찮아?"


다섯 손가락을 못 채울 만큼 소개팅 경험이 적기는 하지만, 주변 지인들의 숱한 소개팅 썰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사진 교환을 하지 않는 게 조건이라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외모는 예선'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 역시 사진을 건넨 후 소개팅을 거절당한 경험이 있었다. 물론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애써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외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기분 나쁘다고 생각했지만 '내 스타일의 외모'가 연애의 필요조건인 사람 앞에서 괜히 불편한 시간낭비를 하지 않아도 되고, 사진만 보고 거절하는 사람과 나는 결이 맞지 않을 것이라고도 생각했기에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진에는 사람의 분위기나 제스춰, 목소리와 몸짓, 눈빛처럼 '외적인 것'에 해당하지만 담기지 않는 것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그 사람 고유의 매력' 같은 것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마음속 주장을 떨칠 수는 없었다. 내 사진을 보고 거절해 주어 시간 낭비는 하지 않았지만, 왠지 '감정 낭비'까지 100% 하지 않았다고 말하긴 어려운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는 좋대냐?'라며 속으로 툴툴거렸던 기억이다.


그 후로도 몇 번 소개팅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사진을 건넬 때면 늘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실제로 만났을 때 상대방이 실망하고 시작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최대한 내 모습과 가까운 자연스러운 사진이면서도 예선 통과를 위한 매력적인 모습이 드러나 있었으면 하는 사진. 그런 일로 사진첩을 뒤적이면, 평소엔 마음에 들었던 사진 속에서도 뭐 하나 적합한 것을 찾지 못했다. 나 자신이 그저 매대 위의 판매 물건이 되기 위한 것 같은 그 절차를 나는 늘 싫어하고 두려워했다.

사진 교환을 하지 않는 게 조건이라니. 그런데 모순되게도, 내가 싫어하는 그 소개팅의 통과 의례가 없다는 소식에 해방감 보다 의아함이 앞섰다.


자기도 잘 모르는 사람인데 내가 얻기 드문 좋은 기회라는 듯 말하는 H의 태도, 사진을 교환하지 않는 조건의 이유, 이전의 유쾌하지 않았던 소개팅 경험 등.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쩌면 내 연애 못함은 생각이 많아서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소개팅 경험이 많고 평소 합리적+이성적인 판단을 내려 내가 이런 류의 고민에 조언을 자주 구하는 친한 친구 K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상황을 빠르게 공유했다.

K의 결론은 이랬다.


"H에게 서운한 네 마음도 이해가 되고 좀 기분 나쁜 상황이긴 하네. 근데 너도 연애가 절실해서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니까 빨리 하겠다고 해. 그리고 H한테 기분 나빠도 티 내지 말고 엄청 고마워하고 굽신굽신 하면서 앞으로 계속 더 많은 소개팅의 기회를 얻도록."


K와 나는 그녀의 노골적인 솔직함에 동시에 빵 터져서 박장대소를 했다. 나는 K의 말이 너무도 맞는 말이며, 다만 잠시 하소연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을 깨달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바로 H에게 소개팅을 하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상대방이 사진을 교환하기 싫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개팅 경험이 많은 K는 그건 둘 중 하나라고 했다. 외모에 자신이 없거나, 나처럼 외모만으로 판단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거나. 하지만 거의 99%의 확률로 전자일 테니 기대 없이 소개팅에 참여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며칠 뒤 상대방 남자와 메시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우리는 만날 시간과 위치를 정하고, 구체적인 소개팅 장소는 서로 좀 찾아본 후에 다시 연락을 하기로 하고 대화를 마쳤다. 약속을 잡기 위해 고작 몇 마디 주고받은 게 전부이지만 메시지를 통해서 느껴지는 상대방은 친절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 같았다. 외모를 기대 말라는 K의 말이 조금씩 잊히며, 어쩌면 정말 좋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나 정말 연애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김칫국 드링킹 모먼트가 찾아오기도 했다.


나는 소개팅 상대와 연락을 트고 약속 시간을 정했다는 내용을 보고하기 위해 H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H는 자기가 먼저 연애해서 내게 빚진 기분이라도 있던 것이었을까? 그녀의 연애 소식에 내가 내비친 서운한 마음에 대한 반작용이 뒤늦게 이런 형태로 돌아오는 것이었을까. H는 뭔가 숙원사업을 하나 해결한 듯이 의기양양하고 기세등등한 말투로 요즘 30대 싱글 남자가 얼마나 찾기 어려운지 아냐며 생색을 냈다. K의 조언대로 나는 다소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 아 그러냐면서 연신 고맙다는 말로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는 대답을 했다.


그런데 H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가 소개팅에 입고 나갈 옷과 신발은 준비가 되었는지, 소개팅 전까지 살을 얼마나 뺄 것인지 등을 연신 물어보면서 같이 쇼핑을 가주겠다고 했다. 다시 외모에 대한 이야기가 거론되자 마음속에 스멀스멀 외모로 거절당하기 싫다는 두려움과 매대 위의 상품이 될 때의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그래서 그만 '자신 없다'는 식의 말을 H에게 했던 것 같다.


그러자 H가 갑자기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언니 그럼 평생 그렇게 혼자 살아"


줄곧 참고 있던 불편한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K의 조언 따위는 한 개도 기억나지 않았다. 평생 H에게 소개팅을 받지 않아도 좋다.(?) 나는 참지 않고 H에게 화를 냈다.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정말 기분 나쁘다."


지금 생각해 보면 H는 마치 엄마처럼 내가 잘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잔소리를 했던 것이고, 미적지근한 내 태도에 답답함을 느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쏴댄 것일 뿐이었을 테다.

내가 H에게 화를 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으니까. H는 놀라서 곧바로 미안하다며 그런 뜻은 아니었다고 사과했다. 아직 감정이 가시지 않은 나는 '그래. 네 말이 너무 심했어.'라고 했다. 그리곤 옷이든 살이든 내가 알아서 잘해보겠으니 걱정 말라며 상황을 수습했다.

H는 소개팅 날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 그때까지 다이어트하면 괜찮을 거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막상 어떤 옷을 입으면 좋을지 몰라 고민만 거듭하다가 소개팅을 며칠 앞두고서야 헐레벌떡 그때 당시 유튜브 인플루언서들이 리뷰를 많이 했던 브랜드에서 블라우스와 구두를 구매했다. 소개팅이 아니면 평소 내가 사지도, 거저 줘도 입지도 않을 옷과 신발이었다. 내 눈에도 정말 예뻐 보였던 그 착장은 내게 어울린다기보다는 내 머릿속에 '소개팅이라면 으레 이런 걸 입고 이런 걸 신어야겠지'라는 생각에 꼭 들어맞는 옷과 신발이었다.


그렇게 소개팅 당일이 찾아왔다. 이런저런 마음의 부대낌에도 불구하고, 조심히 오라는 상대방의 다정한 메시지 하나에 다시 만남에 기대를 하게 됐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여전히 마음속 한편에 자리 잡은 '내 외모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쩌지'하는 불안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나는 '빨리 해치워버리자'라는 생각으로 어울리지 않는 옷과 신발을 착용하고 소개팅 장소로 향했다.


당시 읽고 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당신은 6호실에 머물고 나는 6시에 근무가 끝나거든요.’ 우연을 운명으로 해석하고 싶어지는 사랑에 빠진 마음이 어쩐지 애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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