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당신 앞에 신경섬유종에 걸린 남자가 나타난다고 상상해보자. 우선 신경섬유종이라는 단어 자체가 낯서니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매스컴을 통해 선풍기 아줌마라고 알려졌던 분이 앓았던 피부가 변형되는 질병 정도로 알면 될 것 같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당신의 눈 앞에 신경섬유종을 앓는 남자가 나타난다면 당신은 놀라거나 표정을 구기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대면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비명이나 지르지 않으면 다행일 거다. 그럼 신경섬유종 환자 앞에서 놀라거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은 그에 대한 혐오이자 차별인가? 어려운 질문이다. <영원한 족쇄>는 이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서부터 출발한다.
영화의 오프닝은 배우와 외모에 대한 격언으로 시작된다. 대충 요약하자면 배우의 아름다운 외모는 관객들로 하여금 호감을 유발하며 이는 영화에 긍정적인 효과를 낳기 때문에 아름다운 배우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내용이다. 누구나 충분히 공감할만한 이 격언이 끝난 뒤에 카메라는 영화의 주인공이자 아름다운 여배우 메이블의 모습을 프레임에 채워 넣는다. 메이블은 지금 프리다라는 맹인 역할을 맡아 연기를 하는 중이다. 장소적 배경은 (영화 속)영화 내의 표현에 따르면 '어둠 속에 있는' 신체장애 환자들을 모아 놓은 특수 병원이다. 영화 속 영화의 스토리는 이러하다. 아름다운 외모의 맹인이 신경섬유종 환자와 사랑에 빠지고 수술로 시력을 찾게 되지만 남자의 외모를 보고 혼란에 빠지는 이야기. 여기서 영화는 앞선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일반적으로 괴이하다고 느낄만한 외모 앞에서 튀어나오는 거부감은 혐오나 차별이 아닌 본능이라고. 문제는 그다음이다. 괴이함에 대한 거부감은 본능이긴 한데 이 거부감을 대체 어떻게 포장할 것인가.
<영원한 족쇄>는 이 포장법을 영화 속 영화의 남자 주연 맥스를 통해 먼저 보여준다. 메이블과 마찬가지로 잘생긴 배우인 맥스는 신경섬유종 환자 로즌솔에게 살갑게 다가간다. 먼저 말도 걸어주고 관심사를 물으며 같이 사진도 찍지만 그건 표면상의 표현일 뿐, 조금만 봐도 진심이 전혀 담기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메이블의 포장법은 어떨까. 메이블은 진심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로즌솔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다가가고 도움도 주며 그(를 포함한 다른 모든 장애 배우)가 적절치 못 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 부당함도 느낀다. 하지만 딱 거기 까지다. 메이블의 이러한 감정과 친절은 진정한 공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연민에서 기인한 것이다. 나보다 훨씬 못 한 처지에 있는 저들에 대한 연민.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을 위로해주고 평등하게 대해준다는 우월감이 과연 맥스에게만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매스컴에서 조차 살인자의 외모를 묘사할 때 신체적 결함이 있다고 선전하는 사회의 구성원이 이러한 거부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는 건 자의식 과잉이자 자기에 대한 과대평가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뒤에 이어지는 씬에서도 메이블이 귀여운 외모의 호텔 직원에게 접근하는 방식과 로즌슬에게 접근하는 방식 사이에 굉장한 간극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어떻게 포장을 하건 위에 선 사람은 아래의 사람을 절대로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위로할 수도 없으며 이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이라는 이야기다.
가진 자는 그 지위에 있는 한 절대로 없는 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영원한 족쇄>의 입장이다. 그리고 영화는 단서를 덧 붙인다. '만약 가진 자가 추락해 없는 자가 된다면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건 사실 의미가 없는 단서다. 가진 자가 추락해야만 없는 자를 진정 이해할 수 있다는 건 결국 다른 계층 사이의 위로나 이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장애 배우들이 영화 촬영 현장에서는 말이 거의 없고 신기하거나 이상한 대상으로만 여겨질 때와는 달리 병원에 그들끼리만 남겨졌을 때 말이 많아지고 인간적인 대화와 자유로운 행동들이 나오는 것만 봐도 다른 계층이 아닌 같은 계층들끼리 잘 섞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메이블이 얼굴에 화상을 입고 나서야 로즌솔을 진정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여기서 <영원한 족쇄>는 무시무시한 추신을 단다. 메이블의 꿈인지 메이블이 연기한 프리다의 꿈인지 모호한 화상 꿈 바로 뒤에 붙은 씬은 아름다운 외모의 프리다가 로즌슬과 베드씬을 촬영하는 씬이다. 이 씬의 구성은 매우 독특한데 베드씬을 연기한 두 배우들의 나체는 노출되지만 정작 두 배우의 결합은 보여지지 않는다. 베드씬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키스씬에서 카메라는 절묘하게 두 배우의 포개지는 입술을 보이지 않게 처리한다. 실제로 두 배우가 입을 맞췄는지 맞추는 척만 한 것인지 보이지 않게 처리한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정사가 시작되려 할 때 카메라는 다시 교묘하게 측면으로 빠져 베드씬을 찍고 있는 스텝들의 모습으로 프레임을 채운다. 키스 없는 키스씬, 섹스 없는 섹스씬. 애런 쉼버그 감독은 형식의 기만으로 가진 자가 추락하는 것도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며 두 계층은 영원히 섞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란 출신의 세계적인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영화 속 서사와 메시지가 현실의 관객들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 스며들 수 있도록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지우려 노력했다. 애런 쉼버그의 <영원한 족쇄> 역시 차별과 기만이라는 테마로 스크린이라는 경계를 넘어 관객들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영화다. 극한까지 진보한 분장기술과 CG로 충분히 장애인 분장도 완성시킬 수 있었을 영화가 실제 장애인들을 배우로 캐스팅했다는 점, 분명 픽션을 다루는 영화임에도 오슨 웰스, 다니엘 데 루이스, 호아킨 피닉스 같은 실제 인물들을 계속 소환시킨 다는 점, 엔딩 씬에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완벽한 가짜 리무진 운전기사와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장애를 가진 실제 장애인들을교차하며 영화를 마무리한다는 점 등이 <영원한 족쇄>가 영화 속 영화의 경계를 흐리는 것을 넘어 현실의 경계까지 지우려 하고 있다는 증거다. TV에서는 관찰 예능을 통해 유명 셀럽들 역시 평범한 우리와 별 다를 게 없다고 말하고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유복하게 자란 사람이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위로를 건네는 한국 사회에 <영원한 족쇄>는 불쾌하지만 피할 수 없는 DM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