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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Aug 02. 2019

무거운 것은 나중에 받기로 하다 <엑시트>


한국 영화들이 가벼워지고 있다. 지나친 비장함과 과한 무거움에 질린 한국 영화 관객들은 마블에 열광하고 <극한직업>을 극찬한다. 반대로 호화 캐스팅에 충무로 최고 기대주였던 이수진 감독의 진지한 신작 <우상>은 (사운드 문제도 있었지만) 재기불능 수준의 참패를 겪었다. 영화가 아무리 종합예술이라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영화는 그저 2시간짜리 유희에 불과하며 데이트 코스의 일부이자 테마 파크의 축소판일 뿐이다. 전체 극장의 98%를 차지 대형 멀티플렉스들 역시 이러한 경향을 반기고 부추기기까지 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의 가벼움을 지적하는 것은 의미도 없고 따분한 탁상공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영화가 소수에게 어필할 수 있는 예술로만 남아야 한다는 고결한 주장은 원시적 불능을 강요하는 꼰대의 헛소리와 비슷하다. 그 소수에게 어필될 수 있는 한국 영화는 홍상수가 매년 1~2편씩 제공해주니 그걸로 만족하자.


<엑시트>의 장점은 가벼움에서 나온다. 테러 재난물임에도 테러범에 대한 묘사를 최소화해 재난을 겪는 주인공들에게만 집중하는 과감함, 주인공을 영웅이 아닌 평범한 소시민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뚝심, 조정석과 임윤아에게 최적화된 코미디 연기톤 등은 이 영화의 최고 장점이다. 특히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영웅적인 면모들은 재난물 클리셰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 같으면서 "사실 나도 살고 싶었다고" 하며 울분을 토하는 장면들은 <엑시트>의 가벼움을 무기로 전환시키는 전략적 연출이다. 비장함은 줄이고 적재적소에 코미디를 분산시켜 유쾌함을 발산하는 영화의 전체적인 톤은 여름 텐트폴 무비를 보러 온 관객들의 니즈를 정확하게 캐치해 만족시킨다. 조정석의 클라이밍 씬들에서는 의외로 쫄깃한 서스펜스도 있다.

<엑시트>의 장점이 가벼움에 있다면 단점 역시 가벼움에 있다. 재난을 겪는 주인공에 대한 집중은 후반부에 이르러 그 집중도가 흐려지는데 중요도로 따지면 가장 중요한 인물인 테러범에 대한 묘사는 대충 뭉뚱그려 놓고는 왜 쓸데없는 BJ씬, 뉴스 제작진 씬들은 욱여넣은 건지 의문이다. 또한 액션이 메인 테마인 영화에서 액션의 완성도가 상당히 떨어지고 클라이맥스 액션을 지나칠 정도로 우연에 의존해 구성했다. 조정석이 연기한 캐릭터는 그에게 딱 맞는 배역이긴 했다만 이제 조정석은 '납득이'류 캐릭터가 아니면 아예 연기를 못 하는 지경까지 온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앞서 장점이라고 언급했던 부분들이 살짝만 다르게 보면 단점으로 전부 뒤집힌다. 유쾌함과 유치함은 한 끗 차이인데 이 영화는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아마 유머 코드에 대한 호불호가 이 영화에 대한 인상에 크게 작용할 것이다.

한국 청춘들은 유독가스를 피해 가족, 취업, 연애를 등에 메고 더 높은 곳으로 클라이밍을 해야만 한다.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유독가스의 세상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그 가스를 마시면 '바보'로 낙오된다. <엑시트>는 청춘들이 올라야 할 고난의 클라이밍을 세상이 응원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대책 없는 희망론에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무거운 것은 나중에 받겠다는 마지막 대사에, 그 가벼운 유쾌함에 설득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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