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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a B Apr 11. 2022

Diario BA #1 아르헨티나라는 나라

사람이 입체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듯, 아르헨티나라는 나라 역시 그렇다.

0.

꾸준히 글을 쓰기로 스스로와 약속을 해두고도 글이 왜 이렇게 정기적이지 못한 이유에 대해 굳이 변명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 인터넷에 꾸준히 글을 올리지 않을 뿐, 나홀로 기록은 아날로그식으로 꾸준히 손으로 쓰고 기록하고 있다. 

나의 글은 늘 의식의 흐름을 타는지라, 개인의 내면을 탐구하며 살피는 아주 내밀한 기록부터 한국과 세계 정치나 사회적 고민까지 모두 포함하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이 모두를 오픈된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남미 살이, 아르헨티나 살이,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주제를 한정짓고 나름의 기준을 두어 좀더 정제된 글을 올리려고 노력 중이다. 

- 나는 여전히 집을 못 구해서 여기 생활이 아직 안정적이지 못하다. 

- 호텔에 머무르는 동안 뭐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인터넷이 불안정해서 인터넷이 자주 끊겨 어쩔 수 없이 데이터를 많이 썼었다.


그래서 결국 야심차게 기획했던 Semanario BA가 2주간, 혹은 보름의 기록을 이야기하는 Bisemanario가 되어가고 있다... 점점 시간이 없어지는 구만.... 

뭐 어때, 내 맘대로 되지 않게 되면 그 계획은 수정하면서 실행하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내 상황에 내 마음대로 하는 건데.



1.

3월 넷째주 주말에는 산 텔모 밑에 있는 아르헨티나 역사박물관에 갔다. 

생각보다 규모가 작고 설명이 부실해서 실망이었지만 이건 아마 이 나라의 역사가 짧은 탓도 있을 것이다.



역사박물관이 있는 공원이 더 인상적이다.
18세기, 19세기에 일어난 전쟁이나 과거의 영광들에 대한 역사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때는 아르헨티나가 막 독립국이 되어가는 시점이었고, "나라"라는 개념이 희박했다.


오히려 중년층의 향수를 자극하는 저항음악에 대한 전시회가 더 인상적이었다. 

러시아의 저항음악이었던 록 음악이 경직되어있던 공산주의 사회를 바꿨듯, 아르헨티나에서도 독재주의 정권에 맞서는 저항음악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한 모양이다. 콜롬비아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때 유명한 록 뮤지션들이 아르헨티나에 많았다는데 이는 천천히 알아봐야겠다. 


이곳을 찾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을 찾아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2.

직장인에게는 단비같은 주중 공휴일.

3월 24일 목요일은 Día Nacional de la Memoria por la Verdad y la Justicia(진실과 정의를 기억하는 날)이라는 이름의 아르헨티나 공휴일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현충일에 가까운 날이 아닐까 하는데, 다른 나라들처럼 그냥 Remembrance 로 끝나지 않고 왜 "Verdad 진실과 Justicia 정의"라는 말이 붙는 지 궁금했다.

 

원래는 그날 홀로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 티그레 Tigre 라는 작은 도시로 가서 힐링할 생각이었으나, 그날 날씨는 정말 엉망이었다.

너무나 종잡을 수 없이 비가 왔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하는 흐린 날씨였기 때문에 객기부리며 나갔다가는 고생만 할 것이 뻔해서, 어쩌다 보니 여기 Expat 모임에서 알게 된 콜롬비아 출신 친구와 오후에 오벨리스크 근처 카페에서 잠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원래는 걸어갈 생각이었으나, 날씨 때문에 지하철을 탔다. 시내로 가는 방향 지하철에는 정말 온몸이 끼어서 실려갈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가는 사람들 복장이 다들 뭔가 집회에 나가는 복장같이 옷도 맞춰입고 페이스페인팅도 하고 있더라.



겨우 겨우 도착한 장소에서 내리니 약속 장소가 있어서 친구와 담소를 나누었다. 사람들은 궂은 날씨에도 모여서 타악기 소리와 함께 시위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왜 시위를 하고 있는지 물어보니, 독재 정권에 신음하던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멀리 살타에서부터 와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도착해 거리로 나왔다고 했다. (아르헨티나의 현대사에 관해서는 스스로 좀 더 공부를 하고 긴 글을 써보려고 한다. 우리나라의 현대사와 아르헨티나의 역사가 비슷하다.)


어쩌면 많은 나라의 역사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대로 흘러가는 것 같다. 절대왕정에서 군부독재를 거쳐 다시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진화해가는 흐름 - 권력이 골고루 나누어지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는 많은 진통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국민에게 권력이 이양되는 과정을 겪으며 일반 시민의 정치 효능감이 커지는 쪽으로 말이다.


특히 남미는 식민지였던 역사가 길고, 이를 통해 권력과 부를 축적했던 사람들이 뒤를 이어 정권을 잡았기에 나에게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그림이 강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고 역사를 기억하며 감싸안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3.

3월 마지막 주말의 일요일 현지 친구 미셸과 MALBA, 아르헨티나 현대 미술관에 갔다.

아르헨티나 뿐만 아니라 남미 각지의 미술품이 함께 있었다.


생각보다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미술에 관심이 있으면 반드시 가볼 것.



아르헨티나 아티스트인 Yente(셴떼)와 Del Prete(델 프레테) 부부의 작품을 모은 특별 전시회가 2층에서 열리고 있었다.

설명을 읽어보니 Yente는 아르헨티나로 이민한 부유한 러시아 유대계 가족의 영애였고 Del Prete는 보카 지구의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 출신이었다. 예술의 길에서 만난 두 사람은 함께 작업을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고 하며 그 뒤에는 언제든 함께였다고 한다.

예술이라는 길을 함께 가며 각자의 길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동지이자 평생의 사랑이었던 두 사람. 연인이라는 말보다는 파트너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아름다운 한 쌍의 이야기를 예술이라는 매개체로 쭉 보았다. 


전시회 이름이 "Vida Venturosa 축복받은 삶"인 이유가 있었다. 그들의 강렬한 사랑은 예술이라는 이름의 모양으로 아름답게 다시 피어났다.


그와 마찬가지로 강렬했던 말바 카페의 팬케이크. 미셸과 나는 극찬했다.






4.

시간이 흐르니 학교 일에는 점점 적응을 잘 해가고 있다. 

이제는 학생들도 나도 서로 적응을 해가고 있고, 이 아이들을 이해하고 바르게 성장시키기 위한 방법을 하나하나 찾아가고 있다.

(교직원이나 알 법한 학교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대외적으로 왈가왈부하지 않으려고 한다.)


여튼, 학교는 전체적으로 천천히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는 모습이 엿보여서 나 역시 파견교사로서 흐뭇하다.


4월 첫주 주말 말비나스의 날 공휴일에 열린 이사회 정기총회






5.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내가 몸을 누일 곳은 정녕 없었던가. 싶을 정도로 힘든 내 집 찾기.

그 동안 집을 얼마나 봤는지 모르겠다. 

아직 정식 체류영주권이 나오지 않은 상태라 집구하기도 빡세고 보증금 규정도 빡세고.....

그리고 나를 외국인이니 등쳐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여서 슬펐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이럴 때는 모두 합심해서 외국인을 이용해먹자는 캠페인이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페루에서 살 때 이거 정말 오지게 당해서 페루 사람들을 거의 믿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ㅋ... 여기서는 그 수준까지 가진 않았음 좋겠다....


아무리 그렇다고 방 하나 딸린 곳을 천달러를 달란다. 나를 걸어다니는 달러 취급하는 것이 분명하다.



호텔에서 계속 있을 수는 없어서 조리와 빨래가 되는 곳 옆 아파트 호텔로 한 달짜리 이사를 갔다. 


그리고 아무리 돌아다녀도 제일 처음에 갔던 파르케 센테나리오 근처 새 집이 제일 마음에 밟혀서 결국 이사장님 도움을 받아 그리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고 이미 보증금 지불과 계약서 서명까지 완료했다. 6개월마다 인플레(이곳의 인플레는 미쳤다)를 감안한 조건으로 새로 계약을 하기로 했음.  


고마워, 나의 호텔. 부에노스아이레스 나의 집 넘버 투. 그래도 덕분에 한 달 넘게 편하게 잘 살았다.


결론: 4월에는 레지던스 호텔(절대 엄청나게 좋은 곳은 아니고 그냥 원룸이다) 5월에는 다시 더 넓은 원룸으로 이사를 간다.


현재 머무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나의 집 넘버 쓰리. 작은 원룸형 아파트인데 여긴 정말 혼자 살기 딱인듯 하다. 집에 있을 땐 티비를 보거나 유튜브 연결해서 보면서 스페인어 습득 중.



여기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긴 한데.... 그래도 한 달 있다 떠날 곳이라고 생각하니 큰 안정감은 없다. 

생활 역시 완전히 루틴을 잡을 수가 없어서 좀 힘든 감이 있고, 식재료 구입도 좀 애매하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한달만 버티면 되니 한 시름 놓으려고 한다.

5월에 옮기는 거기가 3개월 동안 네 번째로 ^^ 이사가는 집인데 이번엔 정말 못해도 1년 정도는 아무 일 없었음 좋겠다. 





6.

얼마 전 학교 동료 선생님들과 점심을 먹다가 나온 이야기가 아르헨티나라는 나라가 참 입체적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정말 선진국같은 면모가 있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장애인에 관련한 것이 그렇다. 


나는 이곳에서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나 정신지체나 뇌성마비 장애인, 시각장애인들이 가족이나 친구의 도움을 받아 길거리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생각보다 자주 본다. 

한국에서도 분명 장애인들이 존재할 테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잘 보이지 않으니 자각을 못할 뿐이다. 사실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서 숨어계실 뿐. 


교포 선생님에게 물어보아도, 이 나라에서는 정말 장애가 심한 케이스가 아니고서는 자연스럽게 다 통합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선생님도 아이들도 장애를 가진 친구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리지는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같이 장애인 학교가 왜 혐오시설인지, 왜 학교를 세우는데 학부모님들이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어가며 허락을 맡아야는지 여기 아르헨티나에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다. 그리고 나는 이 점이 우리나라가 부끄럽게 여겨야 할 점이며, 아르헨티나에게서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인권적인 요소나 인식은 아르헨티나가 훨씬 괜찮은 것 같은데, 경제적 상황으로 인한 치안 불안이나(얼마전 BBC Mundo에 따르면 인플레 상승율이 거의 아이티나 베네수엘라급이라고 했다) 낮은 여성인식으로 인한 여성살인, 아동 성폭력 등도 심심하면 뉴스에 나온다는 것(사실 난 이런 뉴스를 주말마다 보고 있다)은 여전히 갈길이 먼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선진국 같으면서도 후진적인 면모도 있는 나라. 참으로 입체적인 나라다.



https://youtu.be/FdUO1NVrga0

현재 남미의 인플레이션 현상에 대해 설명한 비디오. 아르헨티나 이야기가 잘 나와있다. 





7.

그 외 이것저것 부에노스아이레스 살이 모음.

라도부에노라는 메이커 아이스크림인데 마스카포네 치즈 아이스크림이 제일 맛있었다.


이 동네를 벗어나면 제일 그리울 카페 Cafe de los Angelitos. 얼마전에 발견한 사실이지만 엠빠나다도 정말 맛있더라.
5월부터 이사갈 동네 근처 문구점!!!!! 나에겐 한국 벗어나면 제일 그리운 게 문구점(...)인데 아주 작게나마 알파나 교보문고 느낌이 나는 곳을 찾았다.
5월부터 이사 갈 동네 근처 맛집. 자주 오게 될 듯하다 @_@ 이 생맥주는 근처에서 가져온다던데 거기 맥주집을 꼭 가봐야할 듯.


주말에 학교 일 마치고 들린 학교 근처 맛집 향가. 몇년 만에 현지인들에게 더 유명한 맛집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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