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에 대한 혹은 힘든 길에 대한 소회
불현듯 두 번째 캠프힐편지를 정리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9년 양평에 장애아동을 위한 대안학교인 슈타이너학교를 시작하고 많은 사람들과 갈등을 빚고 때로는 함께 기뻐하며 웃고 울며, 잠깐의 성취감에 취해 축배를 들기도 했지요. 그런데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은 행복했던 시간보다 아프고 힘들었던 고통의 시간을 더욱 깊고 길게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문득 이런 생각으로 옮겨갔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그냥 생각이 생각으로만 그쳤으면 그런 힘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만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특수교사로 월급 받으며 살았다면 어땠을까?
-축제를 준비하는 가족들-
믿었던 사람들과의 갈등과 이별, 끝없이 이어지는 소송과 분쟁, 여전히 진행 중인 세상의 따가운 시선, 우리 빌리저들을 향한 차별의 눈빛 등...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에 노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특히나 전편에서 40이 된 아내가 교직을 그만두고 독일로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아내의 독일 유학을 지지하고 잘 다녀오라 했던 남편과의 이혼, 그 과정에서 애정과 믿음은 없고 오로지 재산 분배만이 남아 삼성의 이재용도 아닌 주제에 대법원까지 갔던 일 등...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한국에 발도르프학교와 캠프힐 공동체를 시작해 보겠다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힘든 여정 중에 교사 시절부터 소중한 인연으로 지내는 한 학부모님과 만나 나눈 대화 중 “어느 날 돌아보니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와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라고 하자 안쓰러운 눈빛으로 헛웃음을 짓던 그분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분은 캠프힐마을이 아주 힘들 때 선뜻 조건 없이 통 큰 후원을 해 주시기도 하셨지요. 말속에 담긴 고난한 세월을 함께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와 차분히 생각해 보니 제가 부모강의 중 종종 떠들었던 그 ‘인생의 과제’라는 그것이 저에게 찾아왔고, 저는 그것을 발견했던 탓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슈타이너의 시 ‘평화의 춤'에서 노래했듯이 “나의 별이 나를 찾아냈고, 나의 운명이 나를 찾아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생애에는 우리 빌리저들에게 따뜻한 안식처를 내주는 일이 나의 과제이고, 기왕이면 더 편안하고, 안정된 그런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나의 임무라 깨닫게 된 것이겠지요.
법인을 설립하고 시작한 거주시설인 [캠프힐도토리하우스]에는 사연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마다 부모와의 불편한 운명, 그리하여 접근금지, 보호명령, 혹은 부모의 조기 사망과 이혼 등, 버거운 운명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빌리저들 뿐 아니라 직원인 코워커들도 마찬가지라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자신 인생의 과제를 위해 함께 운명공동체의 일원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거죠.
어제는 새로 입사한 직원이 밤새 자지 않고 복도를 서성이며 음식이름을 외우고 서있는 빌리저의 동영상을 찍어 올렸더군요. 새벽 5시 30분에 말입니다.
생각이 많아지면 어떤 상황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꼬리를 물어 아무 말도 덧붙이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이 딱 그렇습니다. 들락날락하는 직원들, 실업급여를 받는 기간 중에 거짓갈로 지원서를 내는 사람들.. 그런 탓에 전날, 혹은 당일에 약속을 취소당하고 망연해하게 됩니다. 이것도 이력이 날만도 한데 그렇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직 단련이 필요한 시간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자신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비록 저의 인생이 평범하게 전개되지는 않았지만 요즘 돌아보니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는 무엇인가를 해 보려 노력해도 잘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물론 내게도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고비마다 좋은 우군이 있어 힘든 시간을 잘 넘어갔습니다. 여전히 주위에 좋은 분들이 함께 하고 있어 잘 지내는 것 같습니다.
마음속의 소망은 조금씩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뻣으며 점점 풍성해지듯 아직 저의 마음속 소망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우리 캠프힐마을의 조금 더 완성된 모습으로 나아가도록 움직이고 있습니다.**
-주말 외출은 언제나 설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