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 청년이 바라본 신자유주의 시대 국가와 개인
「한국이 싫어서」에서 계나가 여러 번 언급하는 호주행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1)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2등 시민인 계나는 미래를 두려워하며 살아야 했고, 그러므로 떠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생판 모르는 타인들 사이에 끼어 가야 하는 지하철과, 온갖 성형 광고와, 보일러를 틀어도 손이 곱을 만큼 추운 집과, “가만히 있는다고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아무 데도”(103) 없는 것이 계나와 현 시대 청년들이 경험하는 한국의 현실이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강조하는 경제적 효율성에 따른 자유 시장 원리에 따라, 이제 한국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조국’이란 거스를 수 없는 견고하고 엄숙한 경계가 아니게 되었다. 물건도 자유롭게 국경을 넘는 시대에, 사람이라고 해서 태어난 곳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현재 청년들에게는 고루한 편견일 뿐이다.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나도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170)으므로 원한다면 조국을 떠나도 된다고 여기는, 개인적 효율과 선호에 따라 살아갈 국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상상이 가능해졌다. 국격이니 국가의 명예니 하는 것들은 더 이상 청년들의 애국심과 삶의 의욕을 고취하지 못하며, 이는 오히려 청년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기제이고, 따라서 탈피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또한 계나가 20대 여성이라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계나는 지명에게 “강남 출신이고 집도 잘 살고 남자인 너는 결코 이해 못 해”(61)라고 말하며 선을 긋는다. 또 계나는 지명이 계나 부모님의 상주 노릇도 하겠다고 선포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후에 이를 “양반들의 예의범절에 대해 일자무식”(84)이었다며 자조적으로 회상한다. 은혜에 대해서는 “학생 때는 똑똑하던 여자애들이 집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바보”(147)가 된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의 직업을 제대로 된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는 지명과는 함께 살 수 없다고 판단한다. 이처럼 계나는 한국에서 20대로, 그중에서도 여성으로 사는 일의 고난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계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청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여성으로서,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계나의 도피를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적인 결정으로 볼 수만은 없다. 우선 계나가 꿈꾸는 행복은 굉장히 소박하다. 매일매일 웃고 싶고, 돈 걱정 없이 치킨이나 떡볶이를 먹고 싶고, 병원비와 노후 걱정 없이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 또한 무엇보다도, 계나는 한국을 뜨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공동체의 가치인 연대를 잃지 않는다. 계나의 행복에는 “접대를 받는 처지가 되어도 자존심은 배려”하는 것과 “여유가 생기면 사회를 위해 봉사”(153)하는 것이 포함된다. 회사에 사표를 쓸 때 계나의 처지보다 자신의 인사고과 평가를 걱정하여 계나를 만류하던 팀장을 떠올리며, “그 사람한테는 (인사고과 평가가) 나름 중요한 문제였을 텐데”라고 오히려 공감하기도 한다. 이처럼 계나는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을 연민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최소한 피해를 주지는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계나의 공동체적 가치 추구와 연대의식이 오히려 계나를 한국에서 도피하고 싶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계나의 도피는 ‘부당한 한국 사회 시스템에 동참하지 않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계나는 자신이 다니던 회사인 W그룹의 W증권 직원 자살 사태를 보며, 자신이 계속 한국에 남아 있었더라면 고객들에게 곧 부도 날 계열사 회사채와 어음을 팔라고 강요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한국에 남아 있었더라면 그런 거대한 톱니바퀴에 저항할 수 있었을까.”(28)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한국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저 또한 괴물이 되어야 한다는 공포, 그것이 계나의 호주행에 주요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탈조선’ 즉 부정의한 한국 사회에서의 탈피가 계나에게는 공적 정의의 실현이었을 수 있다. 어쩌면 소극적이지만, 그러나 최선의 상상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들에게 이민의 상상력은 생존을 넘어 인간성과 존엄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계나는 지하철 2호선 출근길을 떠올리며 “인간성이고 존엄이고 뭐고 간에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다 장식품 같은 거”(16)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계나는 신분 상승을 위해 이민을 간다고 말했으나, 이때 신분 상승이란 생존과 관련한 경제적 신분보다도 “‘비인격’에서 ‘인격’을 가진 존재로의 ‘상승’”2)을 의미한다. 이들은 개인의 생존 문제뿐만 아니라, 경쟁을 멈출 수 없는 사회 시스템 자체를 비판한다.3)
이처럼 계나와 같은 청년 세대는 ‘탈조선’을 상상하며 손쉽게 한국 사회를 벗어나고자 하며,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됐어?”(11)라고 묻는다. 사회와 맞서 투쟁하던 586 세대에게는 요즘의 청년들이 ‘저항은 안 하면서 불평만 많고 도피나 하는’ 나태한 존재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청년들은 사회의 부당함에 정면으로 투쟁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불행이 사회의 탓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오히려 사회보다도 스스로를 질책한다. 1990년대 후반 IMF 위기 이후 대량 해고와 유연화된 노동으로의 변화로, 신자유주의의 합리성은 자기 관리와 개인적 책임을 내세웠다.4) 이에 청년들은 신자유주의의 착취의 논리를 내면화했다. 계나는 “그때 공부할 시간이 많았는데 회계사 공부 같은 거라도 할걸”(22)이라며고 말하며, 홍대를 나왔음에도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44)라고 이야기한다. 자기 자신을 “나중엔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폐지 주워야”(44) 하는 “길거리 보도블록처럼 흔한 인재”(17)라고 보며 비관적이고 자조적인 자기객관화를 일삼는다.
계나는 끊임없이 '자기착취'5)를 행한다. 그리고 내면화된 착취와 경쟁의 논리는 타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계나가 명문대에 나오지 않았다는 말에 재인이 “나도 지잡대 나왔어”라며 공감하자, 재인은 “난 홍대 나왔는데?”(44)라며 재인과 자신의 거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또 유학원에 도움을 요청하는 유학생들을 보며 “호주에 올 생각이면 비자 승인 메일 정도는 해석할 영어 실력을 갖춰야 하는 거 아니야?”(35)라고 생각한다. 재인에게 “핸드폰이 아니라 셀룰러 폰이라고 해야 하는 거거든?”이라고 지적하며 자신 또한 꼬박꼬박, 좋지 않은 발음으로도 영어를 쓰려고 노력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굴욕감을 주고, 치열하게 자기 능력을 계발하며 경쟁하고 상처 입는, 끊임없는 자기 관리와 자책이 청년들의 현실이다. 청년들은 이로써 굴욕과 무력감을 느낀다. 허희는 이처럼 효율성의 잣대로 손익을 계산하는 것이 ‘내면화된 사육 이데올로기’6)라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청년 세대는 글로벌 시대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고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개척하고자 하나, 그 과정에서도 ‘돈과 능력’의 문제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개인적인 책임을 묻는다. “어디든 국가가 있다면, 어디든 억압은 존재한다”7)라는 말처럼, 신자유주의 국가 시스템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 물리적인 국경을 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처럼 계나의 호주행은 신자유주의 시대 자기착취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채 국경을 넘었다는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계나가 보다 행복해지기 위해 탈피해야 할 또 다른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계나가 국경을 넘은 것은 국제적 위계질서와 보편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주요한 단초가 된다. 계나는 호주행을 통해 “신성시되었던 국권을 공백이나 결핍의 상태로”8) 이동시킨다. 이로써 견고하고 숭고했던 국가는 사라질 수도 있고, 새로 생길 수도 있는 것으로 재정의된다. 이때 계나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자이며 국가가 제시하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한국을 떠나 ‘제3자’가 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편입되지 않은 ‘바깥’에서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재고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정체성과 정치의 ‘비동일시’9)를 통해 규범적 가치를 완전히 거부하지도 수용하지도 않음으로써 자아와 세계를 새롭게 구성10)하는 시작점이 된다. 사소하지만 계속 꾸준하게 행복하겠다며 ‘현금흐름성 행복’을 이야기하는 계나는 이로써 국가 안에 종속된 존재가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다.
1)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한국이 싫어서』, 민음사, 2015, 61쪽.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
2) 이양숙, 「네트워크 사회의 감정공동체와 도시적 공공성」, 『구보학보』 15, 2016, 375-404쪽.
3) 이양숙, 위의 글.
4) 한우리, 「퀴어는 항상 급진적인가?」, 『말과활』 12호, 일곱번째숲, 2017, 83쪽.
5) 한병철, 「피로사회」,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 2012.
6) 허희, 「사육장 너머로」, 『한국이 싫어서』(해설), 민음사, 2015, 197쪽.
7) 김미현, 「청춘의 역습(逆襲)과 세속화」, 『한국문화연구』 30(0), 2016, 67-96쪽.
8) 김미현, 위의 글.
9) Munoz, J. E. 「Disidentifications: Queers of Color and the Performance of Politics」, 『Disidentifications: Queers of Color and the Performance of Politics』, Univ of Minnesota Press, 1999. (한우리, 앞의 글, 88쪽에서 재인용)
10) 한우리, 앞의 글, 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