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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잼피플 Sep 01. 2021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나는 본디 고요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어느 주말에 함께 밥을 먹던 도중 엄마는 IMF 때문에 맞벌이를 하던 시절에 유년기의 나와 오빠를 맡겨두고 출근할 때 엄마에게 가지말라고 울던 오빠와는 다르게 나는 구석에서 조용히 혼자 놀기 시작해서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고 말했다. 나도 강아지를 혼자 두고 집을 나설 때 나를 바라보는 눈과(가끔은 같이 나가자고 현관까지 따라올 때), 그리고 혼자 시무룩해 있는 모습을 보면 엄마가 얼마나 슬펐을까 요새 다시 생각하곤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수학여행 장기자랑 시간에 반 친구들 앞에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는 쑥스러움을 덜 타는 성격이었는데 사춘기가 쎄게 왔는지 그때부터는 반에 있는 듯 없는 듯한, 뒤에서 조용한 친구역을 맡아왔다. 연습장에 눈코입을 그려 돌리다가 멈추면 그려주거나 학기가 끝나고 영화를 골라 틀어주는 그런 역할 말이다.


거진 겨울이 끝나는 시점에 집으로 가는 길에 아주 우연히 중학교 때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났다. 내가 아직 지옥의 4시간 출퇴근을 하고 살고 사춘기 청년시절에 많이 힘들때 내게 큰 힘이 된 친구 중 한 명인데, 영화제 일을 하면서 광역버스에서 기절을 하던지라 서서히 연락이 끊기게 된 친구였다. 우리 둘은 아주 가까이 살고있었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통 만나지 못하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결국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친구와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내가 잊고 있던 나와 나와 함께 한 일들을 말해주는게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내가 이런 즐겁고 좋았던 기억들을 잊고 어쩌면 나쁜 기억들만 오래 기억하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장난스레 친구에게 "너무 많은 슬픔을 겪으면 기억력이 나빠진다는데, 혹시 그런거 겪는걸까?" 얘기했는데 조금 무서워졌다. 나는 원래 오늘내일만 살아, 슬펐던 어제는 잊겠다고 얘기했지만 잊고싶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하는 일들을 티는 내는걸 아주 꺼려했다. 영화제 일을 하면서 생각했던건 나는 무대 뒤에 있는 사람, 그리고 슬램덩크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 중 하나인 변덕규가 채치수에게 "너는 가자미 같은 존재"라고 얘기하는 게 있는데 딱 그런 타입이었다. 보이지 않는 뒤에서, 내 할일을 조용히 하면서 역할에 맡는 사람들을 무대에 올리고, 배치하고, 결산하고 슈슈슉 사라지는 사람 말이다. 마침 근래에는 거진 10년 만에 이력내역서를 정리하면서 또 내가 생각보다 아주 많은 것들을 해오고 좋아하는 일들을 할 수 있던 사람이었던걸 깨달았다. 포트폴리오도 만들어보았는데, 지금의 나라면 하지 않을 레이아웃이나 색상선택 등을 보면서 '와 나 이런 것도 했었지 참' 떠올렸다. 그래서 그런 것들과 일을 하며 느꼈던 점, 그리고 내향적인 성격을 변명으로 하지 못했던 일들을 조용히 기록해보기로 했다. 그래야 만약 다시 영화일을 하지 못(않)더라도 온점으로 마치고 보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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