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훔쳐 들었다. 펼쳐놓은 책의 행간 사이를 차분하고도 낮게 파고드는 목소리였다. 시작은 이렇다. 지하철 바로 옆좌석에 앉은 커플 A와 B.
A - 젖은 수건을 뭉쳐 두면 습하고 꿉꿉하잖아. 그럼 냄새나.
B - 말려서 두면 되잖아. 하루에 한 번 세탁하는 건 말도 안 돼.
A - 잘 생각해 봐. 보통 둘이서 아침저녁으로 네 개를 쓴다고 치자. 그럼 그걸 다 말린다고? 그냥 빠는 게 낫지. 옷도 있고 속옷도 있는데.
A는 하루에 한 번 세탁해야 한다는 쪽, B는 며칠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는 쪽이었다. 그들은, 무척 친절하지만 이익과 손해의 문제에서는 조금의 양보도 비치지 않는 AS고객센터의 상담직원처럼 서로의 말을 조목조목 따지며 자신의 말을 피력했다. 그럴 수 있겠네(아니야), 하지만 말이지(이게 진짜야). 몇 번인가 그들의 말은 반복되었다.
A - 아마 이래서 싸울걸. 아무리 내가 옳은 얘길 해도 이런 식이면 나아지질 않잖아.
B - 다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면 그렇겠지. 하지만 사람은 다 달라. 세탁하는 주기도 다 다르다고.
A - (다정히 웃으며) 다름은 파인애플 주스가 좋아, 사과 주스가 좋아가 다름이고 이건 위생과 청결에 관련된 일이야. 얼굴과 몸에 닿는 거라고.
B - 물론 하루에 한 번 빨면 깨끗하겠지. 하지만 살다 보면 여유가 없을 수도 있잖아.
이쯤이면 당신은 '너는 어쩌자고 그걸 다 듣고 있었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고, 사실 나도 모르겠다. 그저 쥐고 있던 책 보다 그들의 대화가 재미있었고 그들의 말투가, 터지려는 뭔가를 간신히 억누르는 듯한 그 말투가 아슬하면서 흥미로웠다고밖에. 게다가 사람에게 제일 재밌는 소재는 결국 사람이니까.
A - 사실 이건 부차적인 문제라고 봐. 진짜 문제는 한 명은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한 명은 무감하다는 데 있지. 살다 보면 소중함이 무뎌지고 사랑이 식을 때가, 그리고 소중한 것들을 당연하게 느끼는 순간이 오잖아. 그러면 그때부터 트러블이 생기는 거야. 문제라고 생각했던 일들에서부터 말이야.
오, A! 속으로 감탄했다. 꺼내는구나, 젖은 수건의 냄새보다 더 진짜인 것을 발설하는구나. 전철은 잠실철교의 푸른 바깥을 지나고 있었고 A는 여태 빙빙 돌려대던 어떤 것, 구태여 말하지 않음으로 일으키지 않던 어떤 것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B - 시간이 지나면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지. 그래, 자기가 매일 하는 빨래를 고마워하지 않는 순간이 올 수도 있어. 하지만 온다 해도 그게 어때? 그렇게 다들 살아가. 아니면 내가 매번 고마워해야 하는 거야?
오, B. 그게 아니야. 나는 한탄했다. B는 점점 지쳐 뭔가를 놓고 놓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들의 자리 어디에선가 미묘하게 갈라져 불안정한 화음처럼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A의 목소리가 떨렸다.
A - 가끔 자기는 별 것 아닌 듯 말하는데, 그게 굉장히 나를 힘들게 할 때가 있어.
A의 말은 여전히 친절했지만 점점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들은 각자 다른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그 안의 사정은 모른다.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이 모든 게 수건에서 시작했다는 것. 젖은 수건. 빨래. 하루 한번 혹은 며칠에 한번. 그러니까, 생활. 살면서 해야 하는 반복적인 일과와 규칙, 하는 쪽과 하지 않는 쪽, 다름의 차이, 일상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속에 있는 어떤 것들을 점점 끄집어냈다는 것은 안다. 예를 들면, 문제, 무감, 고마움, 어쩔 수 없는 것들, 혹은 말의 태도 같은. 그들은 대화를 이어갔지만 더 이상 수건은 언급되지 않았고 각자의 생활 방식, 환경 같은 것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하긴 대화라는 게 그렇다. 아침에 닦은 수건이 점점 하루의 사물들로 넓어지고 자신의 역사로 깊어지고 미래로 튀어 오르는, 사과 주스냐 파인애플 주스냐보다 더 많은 선택지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핑퐁처럼.
그들의 대화가 이다지도 기억에 남는 이유는 전적으로 마지막(으로 들린) A의 말 때문이다. 이 말을 잊지 않기 위해 그들의 말을 옮겨 적는지도 모르겠다.
A - 기본적으로. 고마움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그 관계는 이상한 거 같아, 난.
저기요 A,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빨래는 며칠에 한 번도 충분하다고도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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