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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Feb 18. 2020

이렇게 알뜰한 로맨스 : 살림 편

오래 쓰는 한 집 살림

설날에 영감댁에서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봉투를 열어봤다. 두둑한 액수였다. 여보 것도 봐봐, 영감 봉투도 얼른 확인해봤다. 빳빳한 오만 원권이 영감 쪽엔 두 장, 내 쪽엔 여섯 장 들어 있었다.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나는 내 봉투 속의 지폐 두 장을 꺼내 영감에게 건넸다.


예기치 않은 돈이 생겼을 때 내가 돈을 쓰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영감이랑 나누는 거다. 어차피 공돈이라 욕심부릴 것도 없고, 무소득자로서 받기만 했던 고마움과 아쉬움을 이럴 때 부담 없이 달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그렇게 나누어도 갖고 싶은 것 한 가지쯤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가령 이 책. 혹은 저 책. 아님 그 책? 아아, 책이라는 물성의 가성비는 얼마나 훌륭한가.

다른 하나는 필요한 순간을 위해 통장에 묵혀두는 거다. 나는 대부분의 계좌 거래를 카카오 뱅크로 하고 있는데, 용도별 계좌마다 세이프 박스를 만들어두었다. 계좌 안의 붙박이장 개념인 세이프 박스는 당장 쓸 일 없는 돈을 저장하는 데 매우 요긴하다.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마다 이자도 붙는다. 그런 식으로 입금되는 현재의 돈은 보관해뒀던 과거의 돈과 합쳐져 적절한 미래에 사용할 수 있는 여유자본이 된다. 돈의 쓰임에 가치가 있다면 한꺼번에 사라진다 해도 허투루 썼다는 후회가 없다.

나는 소액 단위의 돈을 수시로 넣었다 뺐다 한다. 대체로 경조사비, 각종 효도 명목 등에 대비한 이 계좌의 별칭은 '알뜰 모아 살뜰'이다.


영감은 오만 원만 받고 나머지 한 장은 맛있는 걸 사달라면서 되돌려줬다.

영감과 여러 날을 살아본 바, 그는 자잘한 포만감을 주는 지출 말고는 개인적 지출을 거의 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개인 지출이란 정신적 만족감을 주는 소비를 의미한다. 영감은 필요나 편의에 의한 지출을 할 뿐 게임 외의 취미가 없는 데다 술을 마시지도, 친구를 만나 노는 일도 드물다. 이 사람이 바깥일을 하며 큰손을 발휘하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지금껏 지켜본 영감 평소의 씀씀이로는 자기만족을 위한 돈을 쓰는 데 도통 재미를 모르는 사람 같다.

유일하게 뭔가를 산다면 로또일 거다. 영감은 내가 책을 사듯 로또를 산다. 나는 로또 몇 장으로 영감 마음이 흡족해진다면 그 또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일주일간의 설렘과 기대치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책만 한 가성비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나와는 정반대의 소비 성향이다. 나는 정신적 만족감ㅡ주로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ㅡ을 주는 지출을 즐기고 자잘한 포만감을 위한 지출은 거의 안 하는 편이니까. 불확실한 복권에 희망을 걸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는 서로의 소비 습관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터치하지 않는다.

영감 용돈과 데이트 비용으로 일부를 떼어놓고도 수중에 이십만 원을 쥔 나는 엄마한테도 십만 원을 계좌 이체했다. 그러고도 십만 원이 남는 셈이다. 책 한 권 사는 거야 일도 아닌 돈, 그렇다면?

법랑 살래.

응, 사.

환승한 버스에서 영감과 떨어져 앉자마자 검색창을 열었다. 실은 며칠 전부터 법랑 용기 최저가에 불을 켜고 있었다.




요즘 나의 최대 관심사는 불필요한 짐을 덜어내고 오래 쓰는 한 집 살림을 구축하는 것이다.

사람 둘과 고양이 두 마리가 살기에 우리 집은 더없이 아늑한 공간이다. 수납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적은 줄 알았던 영감 짐과 그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던 내 짐이 합쳐진 이래, 우리 집은 범람하는 두 집 살림으로 미어터지기 직전이다. 제각각의 반찬통은 물론이고 냄비와 프라이팬, 식기와 컵, 모양이 다른 수저, 짝이 안 맞거나 휜 젓가락, 여기저기서 증정품으로 받은 수건, 산더미 같은 모자, 유행 지난 옷과 해진 속옷, 신는 것보다 처박아둔 게 더 많은 신발과 양말, 이불과 베개 커버, 공기청정기와 선풍기, 하다못해 헤어드라이기까지 온갖 살림살이가 두세 배로 늘어났다.

그나마 영감은 자취 기간이 짧고 풀옵션 방에 살았던 터라 큰 부피를 차지하는 세간이 적은데도 압도적으로 어마어마한 내 짐과 섞이면서 수납에 난항을 겪었다. 매일 정리정돈을 해도 잡동사니는 하나씩 늘어나고 뭘 하나씩 잃어버린다. 이는 살림의 마법인가, 살림의 마귀인가.


그러던 어느 날, 새해맞이로 뒤죽박죽 섞여 있던 싱크대 서랍장을 갈아엎었다. 사용하지 않고 모아두기만 한 일회용 나무젓가락과 스푼, 빨대 등을 다 버리고 유통기한이 지난 고양이 간식도 내다 버렸다. 싼 맛에 산 뒤 나뭇결이 거칠게 일어난 뒤집개, 플라스틱이 마모된 주걱 따위도 몽땅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그다음 나무 재질의 조리도구를 종류별로 구비했다. 옻칠로 마감된 조리도구는 윤기부터가 달랐다. 수저 세트도 무난한 걸로 샀다. 영감댁에서 챙겨주신 반찬으로 하나 둘 쌓인 빈 통들은 부직포 가방에 가득 담아두었다. 그 후로 줄곧, 법랑 용기 쇼핑몰만 들여다보고 있었던 거다.

반찬통을 법랑 용기로 대체하는 건 몇 년째 이루지 못한 내 살림 로망 중 하나였다. 용기는 한두 개 장만으로 끝이 아니다. 내용물과 담는 양에 따라 십여 개 이상을 요하기도 한다.

일반 가정집 부엌에 플라스틱이나 유리 반찬통 대신 법랑 용기를 정갈하게 갖춘 집을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찬장을 일일이 열어보진 않았으므로 장담할 순 없지만 식사 준비를 돕다 보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가성비일 것이다. 무인양품과 다이소를 예로, 무인양품의 작은 법랑 용기 한 개 가격은 비슷한 크기의 다이소 플라스틱 용기 열 개에 대적한다.

문제는 내구성이다. 플라스틱 반찬통은 자주, 많이 쓰는 만큼 마모되는 속도가 빠르다. 김치처럼 짙은 색상이 배면 설거지를 해도 쉽게 가시지 않고, 마늘 같은 강한 양념이 배면 불쾌한 냄새가 오래 남는다. 소모품에 가깝다는 소리다.

영감은 개의치 않는다. 색 불문, 냄새 불문, 거기다 기름기까지 불문. 음식물을 플라스틱 용기에 옮겨 담는 손길에 거침이 없다. 마냥 훈수를 둘 순 없는 게, 이 정도도 영감에겐 장족의 발전이라는 걸 알아서다. 원래의 습관대로라면 뭐든 비닐봉지째 냉장고에 들어갈 확률이 높다.

소재를 유리나 스테인리스로 바꾸는 게 합리적 대안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법랑을 선호한다. 왜? 예쁘잖아. 앞서 말했다시피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 나는 미관을 따진다. 실제한 집 못 봤으나 책에서는 숱하게 본 법랑 용기의 우아함, 그 통일성. 책이 로망을 키운 격이다.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때 법랑 용기는 결코 무용하지 않다. 식재료의 보존력이 플라스틱에 비해 우수하고 직화나 오븐 사용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차곡차곡 포개어 보관할 수 있어 수납에도 용이하다. 관리를 잘하면 십 년, 아니 그 이상도 모자라 대대손손 물려주기까지 한다. (책에서 그랬다.) 그런데도 법랑 용기는 우선순위에서 번번이 밀려나기 일쑤였다. 십만 원 이상의 투자비용이 예상되는 품목이란 게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이미 차고 넘치는, 멀쩡한 살림의 대체라서 애매한 감도 있었다. 취향이 반영되고 결심을 한 뒤에도 질러, 말어 번뇌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머뭇거리던 자리는 더 급박한 소비 항목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냥 내가 설거지를 좀 더 박박 하면 될 것 같고, 영감한테 잔소리를 몇 번 더 하면 될 것 같았다.


영감의 외벌이로 살림을 꾸리는 우리 집은 아직은 살 만한 모양인가 싶다. 나는 영감의 바깥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혹시나 내가 취직해야 할 형편이 되면 미리 얘기를 해달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영감은 신경 쓰지 말고 글을 쓰라고 한다.

사실 나는 물질적 풍요 차원에서, 둘 다 일을 하며 공동 비용을 부담했던 동거 초반보다 현재의 생활에 더 안정을 느낀다. 통장 잔고만 봐도 알 수 있다. 얼마 되진 않지만 얼마도 안 되던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다.

결혼식에 부모님 도움을 받은 나로서는 결혼식 자체가 경제적 기반이 된 부분도 있다. 그러나 결혼식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 그간 영감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영감은 내가 개털 신세(결혼과도 무관하던 시기)가 된 이후부터 전적으로 두 사람 몫의 생계를 책임져왔다. 달라는 족족 현금도 잘 준다. 부른 액수 그대로를 곧이곧대로 주는 경우가 많지만 한두 장 손에 더 잡힌다고 덜어내지 않는다. 출처를 묻는 일도 없다.

그러니까 나는 청개구리처럼 더 아껴 쓰게 된다. 언제든 영감이 궁금하면 볼 수 있도록 가계부 쓰기를 생활화한다. 고정된 생활비 안에서 우선순위를 지키고 되도록 짜임새 있는 지출을 하기 위해 궁리한다.


그렇게 요원하기만 했던 법랑 용기인데, 나의 청개구리 노고를 알아주기라도 하듯 넝쿨째 굴러들어 온 세뱃돈이라니. 어찌 두근거리지 않을쏘냐.

내 마음은 벌써 새하얀 법랑 용기를 매만지고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가성비를 따지느라 닷새를 훌쩍 흘려보냈다. 결국 나는 처음 눈독 들였던 무인양품과 노다호로 제품 대신 후지호로 쪽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후지호로 제품은 크기가 각각 다른 세 개의 사각 용기가 한 세트로, 흰 바탕에 레트로한 분위기의 꽃송이가 점점이 프린팅 되어 있었다. 투명한 뚜껑은 테두리만 빨간색으로 고무패킹 처리되어 색이 밸 염려도 없었다. 그야말로 입문용으로 제격, 땅땅!  

한 세트도 아닌 두 세트를 호기롭게 결제하고 난 며칠 후, 택배 상자가 도착했다. 곧바로 헹궈서 마른행주로 물기를 제거(책에서 배웠다.)하고 그 영롱한 자태에 취해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런 내 모습을 영감이 또 바라본다. 좋아? 응, 좋아. 예뻐? 응, 예뻐.

 



며칠 전에는 영감과 밖에서 만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로또를 샀다. 이번에는 영감만 산 게 아니라 나도 샀다. 영감이 로또방 앞에서 만 원짜리를 줬으므로 그 돈이 그 돈이지만 따로 비용을 지불하고 따로 두 장씩을 받았다. 각자의 주머니에 로또를 찔러 넣고 나란히 걸어가면서 영감과 나는 김칫국을 마시기 시작했다.


당첨되면 뭐 사줄까? 영감이 물었다.

나? 딸기. 먹고 싶은 걸 무심코 말했다.

여보는? 나도 물었다.

난 햄버거.

맘스터치?

아니 수제버거로.

빵 터진 내가 이어 말했다. 콜라도 사줄게, 그거면 돼?

골똘히 생각하던 영감은 골드, 하고 대답했다. '골드'는 영감이 즐겨하는 게임 속 사이버 머니로, 모바일 상품권을 구매하면 시간 투자 없이 골드를 충전할 수 있다.

얼마치?

십만 원.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농담으로 받아쳤다. 오만 원어치만 사.

영감이 웃었고 기분이 좋아진 나는 더 센 걸 요구해봤다.

맥북 사줘.

중고도 돼?


4컷 만화 같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하하호호 웃다가 연애 초반에도 비슷한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영감은 당첨된 로또로 긴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했고, 나는 집을 사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산 집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따뜻한 집으로 향하는 중이다. 함께 사는 동안 두 번의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그뿐인가. 그날 영감은 점심 메뉴로 햄버거를 먹었다. 집에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꺼내 먹을 수 있는 딸기가 있었다, 아름다운 법랑 용기 속에. 영감에겐 시간을 할애해 얻은 골드가 남아 있으며 나에게는 지금도 잘만 돌아가는 중고 맥북이 있다.

갑자기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행복이 찾아왔다.

여보, 나 행복해.


로또는 둘 다 낙첨되었다. 그러나 알뜰한 우리의 로맨스와 살뜰한 한 집 살림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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