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죠, 오늘도'와 '오늘은 잘 모르겠어'의 간극
때는 2018년 10월 26일, 기상과 동시에 격분한 나. 영감은 본인이 한 행동의 결과가 나의 '빡침'으로 연결됐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치밀어 오른 화를 주체할 길 없던 나는 아이폰을 만지작거리다... 휙 던져버렸다.
평소대로 안방 침대에서 깬 직후였다면 무명이(인형)나 두줌이(인형)나 또줌이(인형)를 아주 멀리, 힘껏 날려버렸을 테지만 하필 그날은 작은방이었다. 선택지는 옆에 있는 아이폰이 전부였다. 손아귀에 납작하고 딱딱한 게 잡힌 찰나 깨지면 낭패인데 하는 염려가 깃들었고, 덕분에 휴대폰이 그린 포물선은 배드민턴의 첫 서브인 양 조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휴대폰은 문지방 너머 장판 위에 무사히 안착했다. 영감은 내 전화기가 던져졌는지도 몰랐을 거다.
내가 던진 전화기를 내가 줍고서 나는 원래 자리로 어정쩡하게 복귀했다. 망부석처럼 앉아 있는 나를 영감이 발견했을 땐 혼란한 감정을 겪는 중이었다. 물건을 던지다니 와 파괴적이야, 괜찮아 나 뚜껑 열렸으니까, 까짓 거 살짝이었어, 다음엔 살짝이 아닐 텐데? 맹세코, 다신 안 그래, 도로 주웠음 됐잖아, 그거 왠지 모양 빠지지 않냐, 아 진짜, 나 화난 거 안 보여? 열 받네.
일어났어?
영감의 말투는 여느 날과 다름없었다. 역시 모르고 있다.
아까 일어났거든. 벌떡 일어났거든.
영감은 당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날 밤,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이리저리 방향을 틀다 몸을 일으켰다. 영감의 숙면을 위해 작은방으로 건너갈 생각이었다. 종종 발생하는 '나 홀로 불면의 밤'을 대비해 작은방에도 독서등을 설치해둔 터였다.
노란 등을 밝힌 후 빈백 위에 철퍼덕, 발 받침대에 두 다리를 쭉 뻗었다. 독서등은 책장 대신 인스타그램 피드를 비추고 있었지만 꽤 근사한 분위기였고 편안했고 고요했다.
그러나 근사하고 편안하고 고요한 만큼 빠른 속도로 졸음이 몰려왔다. 나는 빈백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화장대를 겸한 서랍장 쪽으로 발 받침대를 밀었다. 그렇게 빈백 끄트머리의 얕은 경사를 베개 삼아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다음은 몸이 감각한다. 등이 좀 배겼고, 추웠다.
날이 밝자 영감이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에서 덜 깬 나는 나의 부재를 확인한 영감의 작은방 행차를 기다렸...으나 영감은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잠자코 대기했다. 샤워를 마친 영감이 드디어 작은방으로 들어왔...으나 영감은 나의 존재를 깡그리 잊은 듯 발 받침대를 툭 찬 뒤 로션을 짜기 시작했다. 실눈을 뜨고 영감의 엉덩이를 노려보는 동안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장난하냐?
그러니까 나는 영감이 내 행방을 궁금해하지 않아서 서운했고(나의 아침은 영감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곁에 없으면 고래고래 부르고 본다.), 방바닥에 널브러진 날 내버려 둬서 속이 상했으며(나는 영감이 불편한 모양으로 자고 있으면 자세를 고쳐주거나 편히 잘 수 있는 곳으로 이동시킨다. 걷어찬 이불을 덮어주는 건 덤), 나를 걸리적거리는 진로 방해물처럼 여긴 부분에선 눈알이 뒤집히고 말았다(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예를 들 것도 없다). 결정적으로 이러한 만행을 저질러놓고 태연히 피부 수분을 보충하는 무신경함에 말문이 막혔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기분. 소중한 사람에게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고 방치된 기분의 서러움과 더러움을 이 인간은 알까.
영감은 몰랐다. 이 방에 없으면 저 방에 있겠지 싶었단다. 깊이 잠든 것 같아서 안 깨웠단다. 발 받침대는... 거울 볼 설 자리를 확보하려고 슬쩍 민 게 나한테까지 닿은 모양이란다. 씻었으니 얼굴이 당겼을 뿐이란다. 그런데 어라? 여보가 잔뜩 화나 있네? 왜 그래 여보?
영감의 사고는 단순했고 내 복잡한 심경은 공감을 사지 못했다. 오히려... 이 방에 없었는데 저 방엔 있으니 안심이지 않아? 일어났는데 왜 잠든 척해? 여보가 먼저 잘 잤냐고 인사할 수도 있잖아, 라는 영감 말에 묘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러면 되지, 하지만 기분 나쁘단 말야! 빵야!
발 받침대를 내 쪽으로 치운 것에 대해서만 겨우 사과를 받아내곤 나는 약간 지친 심정이었다. 침대로 돌아가 드러누워 버렸다. 침대 안은 푹신하고 포근했다. 반면 개운치 않은 마음에 머릿속은 시끄러웠다.
우리가 처음 사귀던 날, 영감은 큰 기대를 말라고 했다. 자긴 세심한 타입이 아니라고. 사람에게 특히 연인에게 기대심리가 큰 사람이라면 시작부터 상처가 되는 부적절한 발언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별로 거북하게 들리지 않았다. 건조함이 느껴지는 담백한 태도가 내 마음을 더 사로잡았던 것 같기도 하다. 애가 닳도록 절절한 사랑도, 울고 불며 가슴을 쥐는 연애도, 나는 싫었다. 그저 잔물결처럼 여린 일렁임이 꾸준히 지속되는, 곱고 맑은 관계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영감은 일관성이 있었다. 태생이 냉혈한 건지, 후천적으로 갈고닦은 단련의 산물인지, 가끔은 기계인가 싶을 정도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고 세상만사 신나고 시름이 없었으며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떻게 하든 누구를 만나든 불만 없이 다 오케이였다. 우리는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함께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각자 보냈다. 그런 가운데 영감은 불변의 질량이 있는 것처럼, 적당하지만 모호한 온도의 애정을 매일 주었다. 내가 '사랑하죠, 오늘도'와 '오늘은 잘 모르겠어'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중에도 나 사랑해, 하고 풀 죽어 답하면 사랑하죠? 하고 명랑하게 물었다.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겸연쩍고 민망할 때 나랑 영감이 선답 후문 하는 방식이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사람의 무던함이 무심함으로 다가온다. 그럴 때 내가 받는 타격은 굉장히 크다. 그 충격은 어떻게 흡수되나. 어디로도 흡수되지 않는다. 영감이 애를 써도 풀리지 않고 풀린 것 같다가도 곧잘 침울해진다. 오로지 자력으로, 영감을 사랑하는 마음을 스스로 깨달아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귀여워할 수 있다.
침대 안에서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얄밉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야속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엽지. 앞으로도? 응, 앞으로도. 언제고 또 무슨 신박한 사건으로 내 속을 터트릴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감을 사랑하며 귀여워할 자신이 있지.
곧장 거실로 나가 영감을 불렀다.
결혼하자.
갑자기?
응. 안 해?
아니야, 해.
우리의 혼인서약서는 이렇게 작성되었다.
나는 결혼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싶었고 외부적 요인이나 상대가 주는 확신에 기대고픈 마음이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지금이다 싶은 순간 해버리는 게 내가 바라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혼인이었다. 별것 아닌 일처럼, 구체적 계획이나 구상 없이 해치우듯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영감은 어땠을까. 영감만 알 일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사정에 의하여 정식으로 식도 올렸다. 둘이서 혼인한 지 딱 1주년을 맞이한 날이었다. 성대한 예식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평범한 예식인 것도 분명한, 그런 결혼식이었다.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전력 있는 '빡침'을 몇 차례 겪었고, 그때마다 '현타'가 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승리로 잘 극복해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식' 이후의 영감에게 더 애착을 갖게 되었다. 뭐랄까 그건, 영감을 향한 애착이라기보단 초조함이었다. 더 끈끈해져야 할 것 같고 더 뜨거워져야 할 것 같은.
영감은 다르지 않다. 영감은 영감인 채로, 더도 덜도 하지 않는 본연의 모습을 유지한다. 그 잔잔한 수면에 의문을 품고 오늘은 모르겠는 돌 하나를 던지는 건 언제나 내 쪽이다. 내 기준으로 영감을 바라볼수록 나는 이 사랑이 어렵고 막막해진다.
새해 들어 자주 싸운 탓에 '사네 마네'로까지 상황이 심각해졌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곧 깨우치게 된다. 영감과 나는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이고 둘은 하나가 아니라는 걸. 내가 직접 쓴 청첩장의 문구대로, 우리는 삶의 긴 테두리를 (얼추) 포개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다.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발 맞춰 걸어가자는 뜻은 아니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오늘 나는 영감이 사랑스럽고 괜스레 걱정스럽다. 영감은 글쎄... 여전히 로봇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순간들이 있지만 숨을 쉬고 웃는 걸 보면 아직은 사람 같다. 아마도 내가 영감 곁에 공기처럼 존재하는 한 영감은 계속 사람의 형상으로 웃지 않을까.
야심한 이 새벽, 먼저 잠든 사람의 형상에 가만히 입 맞출 수 있음에 나는 감사한다. 내일은 또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