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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비 Aug 22. 2024

집순이는 집을 좋아한다.

방구석 예찬론자의 스위트홈 찬양기


나는 집순이다. 

생활필수적인 부분이 충족된다면 한 발짝도 안나가고 이주도 삼주도, 한 달도 집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다. 실제로 코로나가 심각하던 시기에는 모든 쇼핑은 집에서 온라인으로 하고 쓰레기를 버리는 일 정도의 바깥 출입만 하며 한 달을 넘게 생활한 적도 있었다. 

나가는 게 싫은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은 좋아하지 않지만 공원이나 수목원으로의 한가로운 나들이는 꽤 좋아한다. 집이 좀, 아니 사실은 아주 많이 좋을 뿐이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집을 내가 원하는 물건과 분위기로 채워나가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밖에 나갈 필요성이 사라지게 되다 보니 더 지독한 집순이가 되었다. 

어릴 때도 그랬는가 하면 아니다. 어려서는 그렇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사실 나는 그 때도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적은 친구를 깊게 사귀는 걸 좋아했고 시끄러운 곳에서 시끄럽게 노는 건 싫어했다. 그렇게 놀고나면 힘들어서 반드시 혼자만 있는 시간을 가져야했다. 하지만, 집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숨이 막혔다. 가정에 불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가족구성원 누군가와 사이가 나빴던 것도 아니다. 다만 더 오랜 과거에는 그러했다. 그 기억들이 가슴에 박혀 나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회사에서 퇴근하고도 나는 집에 가기보다 혼자서라도 밖에서 밥을 먹고, 야근을 버틸 체력을 기른다는 핑계로 헬스장에 들러 운동을 하기도 했다. 열심히 사는 사회인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단지 집에 가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내 손으로 돈을 벌어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자 기를 쓰고 그를 실행했던 것 뿐이었다.



결혼은 탈출구였다.

부모님에게 단 한 번도 말한 적 없지만 매우 그랬다.

구남친 - 현남편과의 연애가 길어지면서 막연하게 결혼을 생각하며 결혼은 내가 이 집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여겼었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가 초등학생 쯤 되니 당시 품었던 생각 자체를 까맣게 잊고 산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들과 좋아하는 것들과 필요한 것들로 꾸민 나의, 우리의 집. 이 곳은 더 이상 탈출구를 통한 대피소가 아닌 내 안식처가 되었다.



우리집은 '우리의' 집이라서 남편의 취향도, 아이의 취향도 오롯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이케아를 분기에 한 번은 방문한다. 뭔가를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다. 꾸며진 공간을 보며 가구의 배치를 고민하고 소품 구매하기도 한다. 아이의 방은 아이의 취향에 맞게, 컴퓨터방은 남편의 취향에 맞게(함께 쓰는 방이지만 이 방의 관리 권한은 남편에게 일임했다), 부엌은 내 취향에 맞게, 거실은 모두의 의견을 모아서. 

고민한 흔적과 노력이 들어간 각자의 공간에 애착이 생기자 나가는 걸 더욱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호텔로 떠나는 호캉스? 아니. 그것보단 집에서 내가 원하는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게임을 하며 즐기는 게 익숙해졌다. 길들여졌다는 표현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한창 뛰어 놀기 좋아할 나이인 아들조차 그러니 뭐, 더 말할 것도 없다. 어디 가고 싶은 데 없냐는 물음에 없다 답하는 아들을 보면 가끔 걱정스럽긴 하다.



다른 사람들이 여행이나 캠핑을 가는 데 쓰는 비용을 우리는 집에 투자했다. 

커다란 티비와 푹신한 소파, 남편과 아이를 위한 콘솔과 PC, 식구는 세 명 밖에 안되지만 넉넉하게 모이기 위한 6인용 식탁과 내 취미 활동을 위한 대형 오븐도 있다. 남편이 결혼 전부터 아끼던 레고들은 이제 아이방에 잔뜩이다. 집에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게 다 있으니 나갈 이유가 사라졌다. (TMI지만 지금은 소파를 치우고 좌식 공간으로 만들 생각에 우리 모두 들떠있다. )

집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자연과 가까이 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거실뷰가 공원뷰다. 창밖으로 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마치 커다란 액자와도 같아서 우리집 가장 큰 인테리어가 된다. 풀냄새를 맡고 싶으면 창문을 열어도 되고, 더 가까이 하고 싶다면 밖으로 나가 한바퀴 돌고 오면 그만이다. 



나는 우리가 함께 만든 이 집이 무척 마음에 든다.

그리고 별 일이 없는 이상 앞으로도 이 집에 계속 살게 되겠지. 내 사촌 동생이 놀러와서 '누나네 집처럼 꾸밀 수 있으면 결혼하고 싶다'는 말에 엄청나게 뿌듯해했던 남편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한다. 친구집에 놀러갔다 오면 항상 우리 집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아들도 마찬가지다.

살고 싶은 집, 머무르고 싶은 집, 따뜻하고 그리운 냄새가 나는 집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나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라 남편도, 아들도 머리를 맞대고 이루는 것이라 더욱 값진 건 자명하다.

그래서 나는 집순이다.

남편도, 아들도 집돌이다.

우리는 이 집을 사랑한다. 이 집에 묻은 우리의 냄새와 추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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