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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헌 Jun 21. 2020

첫 직장 선택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이유

선택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자. 중요한 건, 만족, 그리고, 열정이다.

요즘도 위인전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필자는 위인전을 '극혐'한다. 일단,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다룬다. 당연하다. 실패자의 인생을 기록한 책은 쓰이지도 못하거니와, 팔리지도 않겠지. '줄거리'가 문제다. 구성이 뻔하다. 고난을 겪고, 이겨내고, 성공을 일군다. 그렇다고 썩 유익하지도 않다. 위인의 삶을 보며 나도 성공하려면 어떻게 살아야겠다, 가 대충은 나와야 하는데 대개 그렇지 않다. 성공 방정식에 대해 '유레카'는 나오지 못하더라도, '으흠, 이황 선생이 성공한 삶을 살게 된 것은 OOO 때문이었군'이 나와야 하는데, 잘 안 나온다는 거다. 있다손 쳐도 접목이 힘들다. 대부분 옛날 사람들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아닌가. 성공을 위해 성리학자의 삶을 따라 할 수는 없잖아!


책에 쓰인 위인들의 삶에는 공통적으로 두 가지 교훈이 들어가 있다. 하나는, '열심히 살아라.' 몰아치는 고난에 굴복하지 말고 이겨내면 당신도 위인이 될 수 있다! 둘째는, '좋은 선택을 해라.' 위기의 순간마다 그들이 한 선택은 성공의 가장 큰 요소였다. 김유신이 말의 목을 내려치지 않았다면, 이순신이 학익진을 펼치지 않았다면,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지 않았다면! 문제는, 이런 '위대한' 선택의 배경은 후대에 들어와 뻥튀기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위인전기 작가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교훈을 짜 내야 한다. 갖은 고증과 상상을 통해 선택의 이유를 추정한다. 필자는 그런 상상을 해 본다. 위대한 역사적 선인들은 과연, 매 번, 선택이 필요한 매 순간, 주변 환경이나 결과를 예상하며 기민하게 머리를 굴렸을까? 혹, 이순신 장군님은 울돌목에서 '저쩌그가 물이 쪼까 도는디 저서 싸우면 승산이 좀 있지 않을렁가?' 하고 술 한잔 자시고 쉽게 결정하진 않으셨을까? 해시계 만들고, 측우기 만드느라 바쁘셨을 세종대왕님은, '한자 왤케 어려운겨. 읽기 귀찮어 죽것네. 우리 문자 한번 만들어보라고 시켜볼까?' 하진 않으셨을까?


괜찮아, 너의 탓이 아니야.

지난해 즈음, 십수 년 만에 모교 근처 술집을 찾았다. 아직 학교에 남아 있는 후배 몇을 모아 소주를 기울였다. 학교 근처의 삼겹살 집은 어찌나 그리 저렴한지. 주로 취업 얘기를 나눴다. 한 녀석은 대학원을 마치고 취업을 앞두고 있었고, 다른 후배는 시험 준비 중이라, 자연스레 이야기의 결이 그리 흘렀다. 사뭇 충격이었다. 필자의 학교 정도의 스펙이면 취업이 그리 어렵지 않다. 불과 소주 한두 잔 만에 세상이 달라졌음을 알았다. 취업에 성공한 후배들이 거의 없었다. 삼분의 일 정도는 대학원에 있었다. 집이 그래도 여유가 있는 친구들이다. 그렇지 않은 녀석들은 수년간 참 많은 시험들을 치르고 있었다. 회계사, 변리사로 시작해, 잘 안되자 취업시험에 도전했고, 그마저 여의치 않자 감평사, 법무사를 기웃거렸다. 지금은 대부분이 9급,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필자는 참말 운이 좋았다. 거의 10년간 다닌 학교생활은 딱히 이력서에 적을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해이했고, 학점도 엉망이었다. 회계사 준비도 했었다. 도피성이었으니, 잘 되었을 리가 없었다. 2년간의 공부를 접고, 취업에 뛰어들었다. 2011년 말의 취업시장은 훈훈했다. 5~6개의 자기소개서를 냈을 뿐인데, 2개의 합격통지를 받았다. 물론 좋은 회사는 아니었다. 신의 직장, 혹은 연봉이 높은 직장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소형 증권사에 취업했다. 연봉도 그 정도면 나쁘다고 얘기할 수는 없었으니, 만족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취업 훈풍의 끝물이었던 듯하다. D증권사에 입사한 나의 동기는 무려 서른네 명이나 되었지만, 그다음 해 채용된 신입의 수는 고작 셋이었으니까.


취업시장이 가히 미쳐 돌아간다. 어느 기업도 공격적인 채용에 나서지 않는다. 공채 제도를 없애겠다는 회사도 나온다. 좁아지는 취업의 문턱, 낭만 넘치는 캠퍼스 라이프는 사치다. 프레시맨 때부터 학회를 전전해야 한다. 동아리도 취업에 도움이 되는 녀석을 찾아야 한다. 학점 포기는 인생 포기다. 술집보다는 도서관을 찾아야 하고, 소주보다는 박카스를 손에 쥐어야 한다. 모두가 그런 노력을 한다. 점점 좁아지는 취업 시장, 경쟁은 훨씬 더 치열해질 수밖에.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는 서류 탈락 이메일을 받다 보면 갈수록 초조해진다. 금융권이면 되겠지, 로 시작했다가도, 정신을 차려 보면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회사, 직무를 위해 자소서 복+붙 을 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취업전선에 이미 나가 있는 선배들은 입을 모아 첫 직장 선택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다. 우리에게 선택지란 없다. 어떤 회사이건 상관없으니, 나의 자소서가 피곤에 절은 인사담당자의 눈에 들기만을 바랄 뿐이다. '마상'이 가득한 청춘에게 첫 직장의 중요성을 논하는 것은, 무책임한 조언이다.


걸어온 모든 길이 소중했다.


이 글은 모종의 반성문이다. 나 혼자만 운 좋게, 취업의 막차를 타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일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데 대한 사과문이다. 감히 고한다. 직업의 시작이 어디에 있건 낙담하지 말고, 기뻐하지 말라. 경험자로서 얘기하건대, 당신의 성공은 첫 단추에 있지 않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단추를, 탄탄하게 잘 꿰어 왔느냐에 달려 있다. 뱅크샐러드에서 Business Development Manager로 일하고 있는 필자의 삶을 소개해 본다. 나의 삶을 만든 것은 첫 선택이 아니었다. 걸어온 길에서 얻은 교훈들이 팔 할이다. 원치 않는 영역으로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는 이가 있다면, 부디 이 글을 읽고 힘이 되었으면 한다. 그대가 지금부터 걸어갈 모든 순간은,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첫 직장이라는 선택에 에너지를 너무 낭비하지 말자. 중요한 건 당신의 만족, 그리고 진정한 만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열정과, 몰입이다.





무슨 일을 했건, 나중에 다 도움이 될 거야.

필자는 어느 소형 증권사의 영업직원이었다. 그것도, 'OO동'이라고 얘기하면 그게 서울에 있는 곳인지 모를 정도의 격오지에 있었다. 어떻게 보면, 출발이 아주 미천했다. 2011년의 나는 조금은 낙담 해 있었다. 친구들은 구글에 있거나, VISA에 있거나, 대형 증권사의 본사에서 애널리스트 같은 걸 하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뱅크샐러드라는 회사에서 마이데이터 사업의 밑그림을 그리는 Business Development를 맡고 있다. 객장에서 주식 팔던 놈이, 마이데이터 사업을 만드는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OO증권 XX지점 영업사원"이 내 첫 직장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나의 스토리를 한번 늘어놔 보려 한다.


스무 살 후반의 나는 회계사 공부를 접었다. 2년여의 시간을 들였지만 모든 과목의 점수가 과락 수준이었으니 더 이상 잡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돌이켜보면 부모님 속을 참 많이 썩였다. 알바를 하길 하나, 시험을 붙길 하나. 학원비 명목으로 돈을 참 많이도 당겨 썼다. IMF로 직장을 잃은 후 벌이도 마땅찮으셨던 아버지에게, 8년간 어마어마한 돈을 끌어다 쓴 나는, 그즈음 매우 죄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그만두기로 부모님께 선언 아닌 선언을 한 날, 어머니의 말씀은 뜻밖이었다. "그래, 공부한 것, 나중에 다 도움이 될 거야." 나의 부모님은 가끔 보면 무모하다. 스무 살 후반의, 취업도 안 될 것 같은 아들놈이 시험 준비를 때려치운다는데 이런 반응이 가능하다니. 경험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얄팍하게나마 2년간 배워왔던 회계학 지식은 증권사에 입사한 나를 가치투자의 길로 이끌었다. 얄팍한 법률 지식은 본사에서 연말정산 마케팅을 하게 했다. 기본서를 정리하던 연습은 나를 기획서를 쓸 수 있는 녀석으로 만들었다. 부모님의 한마디가 없었다면, 내가 그 간 얕게나마 익혔던 지식들을 오히려 모른 체하고 부끄러워만 하고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주 얕은 수준의 지식일 뿐이었지만, 생각해 보자, 나의 주변엔 회계원리 책을 들춰본 적 없는, 어쩌면 회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증권사에서 영업질을 하다가, 사고를 치고 본사로 튀었다. 내가 잘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건 사고 친 놈으로 낙인이 굳게 찍혀 있었고, 동기들 다 하는 승진마저 밀렸다. 보통 영업하다가 본사로 가면 적응이 어렵다. 고객 만나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이 영업직인지라, 본사에서는 응당 해야 할 워드, 파워포인트가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필자는 학교를 만 9년을 다녔다. 부끄럽지만, 리포트 작성은 신계는 아니더라도 초인의 영역 정도는 되었고, 파워포인트는 뭐가 막 날아다니게 할 수 있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문서작업 경험과, 당시 팀에 없었던 현장 경력이, 별 성과도 없는 대리급임에도 어디 가서 일 못하는 놈 취급을 받지는 않게 했다. 영업점을 위한 이벤트를 만드는 것이 주업인 팀에서, 1년여를 보낸다.




선택의 순간은 보통,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다가온다.

회사에, 제휴 마케팅을 하는 팀이 하나 생긴단다. 앉아만 있는 우리 팀 일에 비해 너무 멋있어 보였다. 더군다나, 그 팀이 생기면, 내가 있는 팀의 입지가 줄어들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리저리 잴 게 안되었다. 대놓고 들이대기 시작했고, 잘 받아들여졌다. 애매모호한 '마케터'였던 나의 직업은, 순식간에 '제휴 마케터'로 바뀌었다. 몇 달 즐거이 일을 했다. 성향 자체가 앉아 있는 놈이 아니다 보니, 1년 여 잡고 있던 문서작업을 놓게 된 그 몇 달은 그야말로 배에 돛 단 듯, 했다.


갑작스레 사수와의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문제였는지 말이 잘 안 통했다. 돌이켜보면, 사수는 입사한 지 1년 남짓 지난 사람이었다. 나에게 '공채 부심' 같은 게 있었는지 사소한 문제들이 생겨났다. 험담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별을 선언했다. 거창한 선언은 아니었고, 다소 험블 했다. "저는 핀테크 스타트업과의 제휴에만 매진하겠습니다. 차장님께서는 하시던 대로 대형사 제휴를 하시죠." 그때 만났던 회사가 지금 몸 담고 있는 뱅크샐러드이다. 지금은 커진 여러 회사를 두루 만나고 다녔다. TOSS도, 에잇퍼센트도, 뱅크샐러드도, WADIZ 도. 여담이지만, 직원수가 30여 명 남짓하던 그때 당시의 뱅크샐러드는, 숱한 고민을 안고 입사 지원했던 필자를 탈락시켰다.



필자의 삶에 선택이라는 순간은 늘 불현듯 찾아왔다. 워낙 무계획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단기 계획, 중장기 커리어 패스를 그리는 사람이 과연 있긴 할까 싶다. 되짚어보면 사회초년생, 취준생 시절에 이런 생각이 많다. '증권사 RA로 우선 입사를 하자. 역량이 커지면, 산업을 하나 맡아서 언론사 대상 한번 받아야지. 그러고 나서, 전문 사모 운용사로 들어가면 좋지 않을까?' 계획은 좋지만, 우리네 이 스펙터클한 삶에는 변수가 너무나 많다. 어렵사리 결정한 나의 삶의 로드맵이지만, RA로 시작하지 못하면 대미지가 크다. 그 후는 어떠한가.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주니어는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허드렛일을 하며 지치지 않을 각오는 있는가? 타이트하게 짜인 계획은 오히려, 달성에 실패했을 때 '마음의 상처'로 다가올 공산이 크다.


바깥보다 안을 보라.

참 치열하게도 살았구나, 싶다. 핀테크, 스타트업과의 제휴에서 굵은 성과가 안 나오자, 스탁론이라는 사업에도, 투자권유대행인이라는 사업에도 손을 댔다. 업계 후발주자임에도 개인기로 이것들을 돌파해 보겠다고, 담당자를 만나 술을 마시고 다니고, 열 시간이 넘는 교육 프로그램을 홀로 만들기도 했다. '금융고수당' 이라는 카페를 만들어 회원을 모집하기도 했고, 매일매일 시황을 정리해서 올리고, 금융상품을 추천하는 카드 뉴스를 한 땀 한 땀 직접 만들기도 했다. 힘들었을까? 하루하루가 미친 듯이 재미있었다. 영업에 비하면 힘든 것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던 데다, 나를 드러내는 일을 그리도 즐긴다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소위 '마바라'들만 나간다는 방송에도 출연했고,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대형 자산운용사에서 러브콜이 왔다. 콘텐츠 마케터로서의 역할이 요구되었다. 영업직원에 이어 마케터, 제휴 마케터를 지나, 세 번째 전직인 셈이다. 흔쾌히 전직을 결심했다. 더 좋은 회사라는 데 의구심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3차 전직은 그간의 노력에 대한 결과물과도 같았다. 증권사 영업직원이, 자산운용회사의 콘텐츠 마케터로. 세 번의 직종 변경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자평컨대, 열정이라고 본다.


직장인은 두 부류로 나뉜다. 밖을 탓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을 보는 사람이다. 전자는 환경을 탓한다. 대표가 하지 말라는 데 어떡해, 컴플라이언스가 하지 말라는 데 어떡해, 쟤가 안 도와줘서 그래, 같은 말을 달고 산다. 대부분이 그렇다. 탓하고 싶지는 않다. 회사원이란 애초에, 회사가 굴러가기 위해 적절히 배치된 부속품이다. 다른 부속이 안 돌아가는데, 굳이 또 하나의 부속인 내가 나서는 건 오지랖이다. 그런 "R&R" 이 있어야 조직이 굴러가는 건, 맞다. 이런 게 체질 상 잘 안 맞는 사람도 간혹 있다. 컴플라이언스랑 싸우는 애들, 지네 팀장한테 개기는 애들, 상무한테 개념 없이 직언하는 애들, 같은 사람이다. 밖으로 드러나는 안 좋은 모습들이 이래서 그렇지, 사실 이 부류는 화살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돌린다. 이들을 움직이는 요인은 상사의 갈굼이 아니라 '자격지심'이다. NH투자증권은 TOSS에 들어갔는데, 왜 나는 못했지? 삼성증권은 뱅샐에 광고를 싣는데, 나는 뭐 하고 있는 거지? 같은 것들이다.



환경을 탓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 여하에 따라서 회사에 계속 자리를 지키고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남 탓도 하루 이틀이지, 뻔히 보이는 그 변명을 듣는 상사가 좋은 평가를 내려주기는 어렵다. 후자인 사람들은 엉덩이가 가볍다는 단점은 있다. 여담이지만, 저 중에는 똘끼가 충만한 사람이 좀 많다. 속 빈 강정 같은 부류도 많다. 아무튼, 성장의 속도가 후자의 그룹이 더 빠르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모두가 같은 삶의 방향을 가지고 살 수는 없다.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원하는 대로 살아가면 되니까. 다만, 이 글은 지금의 선택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이제부터 나를 보는 편이 좋다. 비관적인 환경에 서서, 그 환경을 비난한다면, 나에게는 어떤 과실도 주어지지 않는다. 잘 나가는 동료들을 보며 자격지심을 세워라. 돈 잘 버는 대학 동기를 보며 시기심을 키워라. 그것이, 당신을 한 발짝 나아가게 하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길은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더군다나, 지금 당신의 모습은, 당신만의 책임도 아니다. 앞으로를 보자. 어떤 선택을 했건 너무 상처 받지 말자. 당신이 앞으로 걸어갈 길에는 무수한 선택지가 널려 있다. 그저 우리는, 지금의 삶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한 가지만 약속하자. 충실하게, 치열하게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다면,


재미있게 미쳐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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