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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rdSong Oct 11. 2020

사람이 머물렀던 자리에 비석을 세우면

수목원과 공동묘지

빈 벤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자리에 누가 앉았을까. 이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이 익숙한 느낌은 뭐지?

아! 순간 떠올랐다. 언젠가 가봤던 미국의 한 공동묘지. 그걸 깨닫는 순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수목원에 서 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그 자리에 비석이 남았다.





가을 볕이 좋은 연휴의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친정 식구들과 수목원을 걸었다. 

서늘해진 날씨이지만 여전히 고상하게 피어있는 장미원의 꽃, 덩굴 식물이 늘어뜨려진 정원에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멋진 정원을 걷다보니 뭔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뭘까, 뭔가 낯설면서 익숙한 이 느낌 뭘까. 아름답지만 뭔가 허전한 이 느낌이 뭘까.

빈 벤치를 바라보며 이 자리에 누가 앉았을까, 생각하다 깨달았다.


수목원의 벤치. 누가 앉았을까. 여기에 앉았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 뭔가 익숙하다 했더니 그렇다. 언젠가 가 봤던 미국의 공동묘지와 딱 닮아있었다. 

단지 비석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달랐다.





 

미국 유학 시절, 그곳의 친구들이 공동묘지를 한번 가보라고 했다. 

미국인 친구들이 권한 것은 아니고 주로 한국인, 아시아인 친구들이 권했던 것 같다. 

공동묘지를 가면 사슴이 있을 거라고.

사슴? 공동묘지에? 어떤 느낌인지 전혀 상상이 되질 않았다. 권하는 친구들이 말하길, 한국의 공동묘지의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고 했다. 가보면 죽음을 옆에 두고 그 안에서 평화롭게 걷는 느낌이 뭔가 이상하다고 했다. 한번 쯤 가봐야지, 생각만 하며 미루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쯤에야 가 보았다.


정말로 그 공동묘지는 내가 생각해오던 공동묘지와는 달랐다.

아름다운 꽃과 덩굴식물이 오래된 벽과 철문을 감싸고 딱 봐도 오랜 시간 그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나무들이 짙은 녹음을 드리우고 있었다. 

사슴이 있댔는데, 어디 있을까. 마주치면 놀라지 않을까...하면서 천천히 들어가봤다.


마침 아무도 없었다. 조금 걷다보니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는 사람도 간혹 보였다.


그곳은 공동묘지라기보다는 한국의 잘 가꾸어진 수목원 같았다.

그때 당시 찍은 사진은 하드를 도난당해 남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비슷한 사진을 찾아보았다.


pixabay @ EM80


이 사진들은 Vienna's Central Cementery의 사진이다.  

비석들이 아름답고 주변 식물과도 오랜 시간 어울려 그 곳에 나무처럼 뿌리내린 느낌이다.



pixabay @ EM80



이 느낌이, 내가 미국의 도시에서 보았던 공동묘지의 느낌이었다.

보이지 않는 풀숲 어딘가에 사슴이 함께 걷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걸으면서 비석 하나 하나 읽어보았다.

너무 일찍 떠난 아기도 있었고, 한 세기 가까이 살다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떠난 사람도 있었다.

그 비석들을 읽으며 느낀 점은 우리 나라의 비석과는 다르게

고인의 인생이 담기거나, 고인의 인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비석에 적혀있었다는 점이다. 



얼마전에 갔던 수목원


수목원을 걸으니 미국에서 걸었던 아름다운 공동묘지의 딱 그 느낌이었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햇살이 따뜻하지만 공기는 조금 차고 습하게 피부에 닿았던 그 느낌과 오래된 풀, 흙냄새가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수목원


이 풍경도 정말 그때 본 공동묘지와 비슷했다.

사람이 적어 혼자 천천히 거닐었던 공동묘지의 그날 오후와 더 닮아있었다.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 땅에 묻힌 사람의 몸과 함께 오랜 시간 자연에 흡수되어 자리잡은 식물을 생각하니

사람은 사나 죽으나 아름다운 공간에 머무르고 싶은가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후 머무는 공간이 아름다우면 산 사람을 초대하고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만남의 시간을 만들어낸다. 

산 사람은 죽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걸으며 그 사람을 추억하고, 정서와 영으로 만난다.

그래서 외국의 공동묘지들의 비석은 예술 조각상과 함께 있는 경우도 많고

주변의 정원도 아름답게 가꿔있는 게 아닐까.


친정아버지는 몇 년째 가족묘지를 가꾸고 계신다.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 할아버지 할머니... 흩어져있던 묘를 이장하며 화장하고 한 곳에 다시 모셨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조상들의 비석에 짧은 시를 담으신 이유도 그것이었다.


산 후손들이 함께 하고 싶도록 아름답게 만들어 

영과 정서로 연결된 가족의 만남이 가족묘지에서 이루어지게 하고 싶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비석.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지으신 시.


할아버지는 7남매를 키우며 고생만 하시다 둘째인 아버지가 군대에 있을 때 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평생 남의 집 일만 해주고,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사셨음에도 효도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아버지는 '가을이 오기도 전에 떠나신 님'이라는 시를 지어 올리셨다.



칠갑산에 있는 가족묘지



디즈니에서 만든 영화 <코코>에는 '죽은 자의 날'이 되면 내세에 있던 죽은 영혼들이 산 가족이 있는 현세로 나오기 위해 금잔화 다리를 건너온다.

그때 일종의 '출국 수속'을 밟는데, 심사 기준이 바로 '후손의 집에 그 죽은 자의 사진이 있는가'이다.

후손이 그를 기억하고 추억하는가가 그 영혼이 현세로 건너올 수 있는 조건이라니

나는 그 부분에서 소름과 눈물을 동시에 느꼈다.


죽은 자의 영과 산 자의 추억이 공존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는 죽은 자가 이루어 남겨주고 간 유산으로 살고 있으니까.







수목원에 산 사람이 서있을 뿐, 언젠가 보았던 공동묘지와 풍경이 거의 같다는 생각을 하니

순간 마치 영화속 한 장면처럼

사람들의 모습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 비석이 남는 것 같았다.


요즘은 수목장이나 화장을 많이 하고 비석을 세우는 문화도 줄어들고 있지만

비석이든 나무든, 죽은 자는 산 자로부터 자신이 산 만큼의 상징물을 선물받는지도 모른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서 있던 자리에는 어떤 모양의 비석이 남을까.

그 비석에는 어떤 시가 쓰일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떤 글을 남겨줄까. 그것은 마음의 비석이다.

사람이 죽으면 산 자의 가슴에는 그 사람을 기억하는 비석이 세워진다. 나무가 심어진다.


어쩌면 누군가는 남은 산자들로부터 비석을 선물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영혼은 죽은 후에도 외롭게 남는다. 

<코코>에서 후손이든 누구든 산 사람이 기억해주지 않는 영혼들은 결국은 내세에서도 소멸되는 것처럼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다. 

산 사람이 기억할 만한 무언가를 남겼을 때, 죽은 자 또한 존재의 이유가 있다.

보통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는다.


 

수목원과 공동묘지.

세월의 꽃이 핀 정원에 사람이 걷고, 그 자리에 비석이 남는다.

내가 머물렀던 자리에는 어떤 시가 남을까. 산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해줄까. 

삶과 죽음을 껴안은 도시의 정원이 나에게 묻는다. 








표지사진 pixabay @Michal_Buk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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