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온 지 1년, 중간 점검과 인턴십 지원 후기
석사 프로그램은 대부분 5월 말~6월 첫째 주에 마무리된다. 그리곤 장장 6월 초부터 8월 말에 걸친 석 달간의 여름방학에 들어간다. 우리 학과는 6월 1일에 1학년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헬싱보리 시내 전경이 내려다 보이는 캠퍼스 7층 세미나실에서 각자 발표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1년이 지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한편 스스로가 장하기도 하고 감개무량해서 다들 한껏 들떴던 게 기억난다. 물론 전날 발표 준비 때문에 대다수가 새벽 3~4시까지 준비하느라 얼굴들이 말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종강을 하면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종강파티를 하거나, 수업 끝나자마자 고향에 가려고 코펜하겐 공항으로 향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일부는 유럽/아시아 국가를 여행하거나 인턴십 오퍼를 받고 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스웨덴에 머물며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계속 Sommar Jobb이나 인턴십 자리를 알아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도 후자 중 하나였는데 서류(비자 연장 포함) 문제로 열흘 정도 짧게 한국을 방문한 것 외엔 바로 스웨덴에 복귀해 인턴십 자리를 구하고 스웨덴어를 공부하는 데 집중했다.
입학 전부터 계획한 일이기도 하지만 새삼 이런 결심을 굳히게 만든 일이 있었다. 수업 마지막 날 오스트리아 친구가 아예 짐을 싸서 캐리어를 끌고 왔다. 이 친구는 이미 5월에 구글 아일랜드 지사에서 인턴십 오퍼를 받았는데 종강일에 바로 거취를 인턴십이 시작되는 더블린으로 옮기려고 하던 참이었다. 업무가 6월 4일 바로 시작한다고 했다. 날 포함한 모두가 부러움의 시선으로 친구를 축하해 줬다. 친구가 부러운 한편 개인적으로 반성하게 된 계기가 됐는데, 그동안 학과 일정이 빡빡하기도 했고 공부가 (의외로) 너무 재밌었던 탓에 구직활동은 손을 놓고 학과 공부에만 몰빵을 했던 점을 심각하게 되돌아보게 됐다. 애초에 나는 구직을 목표로 석사 지원을 한 케이스인데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덕분에 학점은 잘 나왔지만 뭐가 내 목표인지를 객관적으로 사태를 판단하고 반성, 점검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6월이 그 적기였다.
그래서 6월 중순쯤 그야말로 도둑이 다녀가듯 한국을 짧게 방문한 뒤 스웨덴에 빨리 복귀해 본격적 준비에 들어갔다. 운 좋게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고 대기하던 중 코펜하겐 공항 대합실에서 급하게 써낸 인턴십 자리가 있었는데 하필 한국에 있을 때 오퍼 메일이 왔다. 구직 활동 초기라 처음 오퍼를 받고 어벙벙하기도 하고 기쁜 한편 걱정이 앞섰는데, 12달 근무에 런던에 있는 회사라 당장 다음 학기를 접고 스웨덴의 기숙사에서 방을 빼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틀 정도 고민하다가 '아직 구직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니 다른 자리도 있겠지'하고 고사했는데 이것 때문에 한 달 간을 혼자 이불 킥을 해야만 했고 맘고생이 심했다.
하지만 그것도 뒷날 이야기고 당시에는 직무 명세서를 보니 아무리 인턴십이라지만 쥐꼬리 봉급에 격무에 시달리겠구나.. 하는 심상찮은 느낌이 공항에서 지원서를 쓸 때부터 왔었다. (생각해보니 그래서 지원자들이 기피해서 내가 오퍼를 빨리 받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설였던 건 이 회사가 런던 시 산하의 유명한 공기관이기도 했고 영국에 살고 싶진 않지만 내가 앞으로 일하려고 하는 관광업계에서 런던은 한 번쯤은 일하고 싶은 매력적인 근무지였기 때문이었다. 공부를 하다 보니 더 실감했는데 유럽 내에서 영국, 그중에서도 런던의 여행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역할이 월등하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놓치기 아까운 기회였다. 하지만 기간이 12달로 너무 길고 직무도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쪽이 아니라 거절하긴 했는데 그 후유증이 한 달은 갔다. 미친 선택을 한 건 아닌지 후회를 많이 했고 이미 지난 일인데 여전히 내 선택에 확신이 안 가서 주변 지인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조언을 구했다. 당장 상황이 바뀌는 건 없지만 플랜 B를 세우는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그렇게 한 달을 꾸준히 지원한 결과 드디어...! 8월 6일에 원하던 직종으로 오퍼가 왔다. 별도 계획이 있어서 인턴 기간이 길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는데 정확하게 그쪽에서 원하는 기간이 9월부터 12월까지였고, 공교롭게 헬싱보리 스타트업 기업들을 육성 지원하는 생태계 허브가 우리 학교 캠퍼스 건물 안에 있는데 그곳의 마케팅 인턴을 하게 됐다. 개강일이 9월 3일이니 학업과 병행하며 근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연의 일치지만 가끔씩은 누가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딱 맞는 자리를 얻게 돼 정말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사실 스타트업 쪽은 관심이 없어서 지원도 차일피일 미루다 했고 기대도 안 했는데 의외로 일이 너무 쉽게 풀렸다.
인턴십이 필요 없는 능력자들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1) 여름 혹은 졸업 전 현지 인턴 경험을 쌓고 아니고 가 졸업 후 구직활동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주변 사례들을 통해 비슷한 걸 느꼈기 때문에 인턴십이 여름방학 혹은 졸업 전 해낼 목표 중 하나였다.
2)현실적인 이유 외에도 경험과 지식 습득 면에서 아무래도 학과 공부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인턴으로 실무지식을 보충하고 싶었다. 나는 한국에서 미디어 쪽 경력이 있지만 경력전환을 하려면 더 이런 경험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3)세번째 이유는 좀 개인적이긴 하지만 일년 간 대학에 있다보니 일을 하고 싶어서 몸살이 날 것 같았다. 입학한 뒤 지금까지 꾸준히 두세 가지 일을 하고 용돈벌이도 됐지만 현지에서 '직장'을 다니며 일을 하고 싶었다. 직장이란 둥지, 사무실의 느낌이(그리고 월급봉투도) 많이 그리웠나보다.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것이 막상 백업이 될 인턴 자리를 그것도 학교 건물 옆에 얻고 나니, 아 그때 오퍼 넙죽 받았더라면 런던으로 이사하고 스웨덴보다 악조건에서 또 집 구하고 기존 기숙사 세주고 비자 문제도 스텝이 다 꼬이고, 적은 봉급에 1년 동안 과로사(?)할 수도 있었는데 안 그러길 천만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도 다른 계획이 있어서 12월까지 일을 계속할지도 모르겠고 더 나은 조건의 오퍼가 오면 (죄송하지만) 냉큼 갈아탈 생각이라 여전히 불안정한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도 스스로 약속한 걸 지켜내서 뿌듯하다. 내가 한 짓이라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고 한 달 동안 그 런던 자리 거절한 것 때문에 맘고생이 심했는데 역시 끈덕지게 하다 보면.. 내 노력을 보상받는 것 같아 기뻤다.
공교롭게 8월 6일 같은 날, SFI 수업이 재개강했는데 선생님이 너 D코스 승급해야 하니 C코스 시험 준비하라는 말씀을 하셔서 눙물이 날 뻔했다. 2월에 C코스로 옮긴 뒤로 주변 유럽애들은 2~3달 뒤 너무 쉽게 반을 옮기는데 난 6개월간 계속 남아서 심란했다. 학과 공부를 핑계로 수업 빠지고 공부에 게을리한 것도 자책하면서. 아직 D로 가기엔 많이 부족한 실력이지만 그래도 여름방학이 부족한 공부를 보충하는 좋은 기회가 됐던 것 같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번 여름방학은 정말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여름 동안 내가 목표로 한 것의 70점 밖에 주지 못할 정도의 노력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잡고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친구들이 다 유럽 어디론가 여행을 다니고 남/여친과의 사진이 페북에 뜰 때마다 사람도 얼마 없는 도서관에서, 이 날씨 좋은 여름에 내가 뭐하는 짓이지 이런 자괴감도 들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만 여행 가는 것보다, 가끔 축제 가서 놀고 잔디밭에서 광합성했던 것보다 공부하고 구직활동 했던 과정이 훨씬 더 재밌었다. 그래도 가끔 준비하다 고구마 백만 개 먹은 듯 답답하고 아오 다 때려쳐! 이런 기분이 들 때면 남자들과 데이트를 하거나 교외 호숫가에서 수영도 하고 숲에서 블루베리 따먹고 친구들과 만나서 수다도 떨고 그것도 지치면 집에서 혼자 음악 들으면서 혼맥 하고 이런 식으로 숨 돌리면서 쉬어갔던 것 같다. 아무 생각 않고 화창한 스웨덴의 여름을 만끽하면서.
내 방은 6층 기숙사 꼭대기라 여름에는 햇볕이 지붕에 정면으로 꽂힌다. 에어컨 시설이 있는 게 아니라 올해처럼 이상고온이 기승을 부리는 날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힌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옥탑방(?)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다. 이런 소소한 기억들이.. 사실 아무것도 아닌 기억들이지만 정말 애틋하고 소중하고, 앞으로도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
오는 8월 14일은 내가 스웨덴에 도착한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인데 여전히 믿기지가 않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누구든 만나 맥주라도 한 잔 하고 싶지만 월요일이라 기껏 할 수 있는 일이 SFI 수업 같이 듣는 친구들과 자축하는 것밖에 없을 것 같다. 일 년 전 8월 15일에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가 "넌 운이 좋은 사람이다, 모든 일에 감사해라, 인생에 취한 듯이 행복하게 살고 하고 싶은 것 다 해 봐라"라고 했었는데 마침 애가 오늘 아침에 뜬금없이 우정에 대한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래서 답장을 하길, 네가 일 년 전에 이런 말을 했는데 그때 한 말 그대로 내 삶을 즐기고 있고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사랑스럽고 애틋하다고, 했다. 유학을 오길 정말 잘한 것 같다. 진심으로 만사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