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끝은 늘 고요하다. 사무실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 순간, 남아 있는 건 내가 흘린 시간들뿐이다. 종일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진다. 문 밖으로 발을 떼며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칠 때, 긴장이 풀리며 깊은숨이 새어 나온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갔구나. 그 짧은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어스름처럼 내려앉는다. 하루를 버텨낸 스스로에게 보내는 작은 위로다.
길 위에 줄지어 선 가로등은 희미한 빛으로 나를 감싼다. 가끔은 비에 젖은 아스팔트가 반사하는 빛마저 퇴근길을 밝혀주는 듯하다. 빗방울 자국이 번진 차가운 공기는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도시의 체온 같다. 이 공기를 가르며 지나가는 사람들, 자동차 불빛, 도심의 소음은 모두 각기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하루를 견뎌낸 이들의 발걸음은 도시의 리듬을 만든다. 그 안에서 나도 하나의 음표처럼 섞여 흐른다.
나는 늘 어제와 오늘이 비슷하다고 느끼지만, 그 둘은 결코 같지 않다. 도로 위를 지나치는 차들의 불빛이 흔들리며 만들어내는 물결처럼, 하루의 끝에도 늘 새로운 빛깔이 배어 있다. 오늘의 빛깔은 어떨까. 어제보다 흐릿한 파란빛일 수도, 혹은 더 짙어진 붉은빛일 수도 있다. 그 빛 속엔 내가 견뎌낸 하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제와 닮은 것 같아도 그 결이 다르고, 순간순간 다르게 새겨진 오늘의 자취가 있다.
퇴근길, 그 피로함과 충만함 사이에서 나는 나를 마주한다. 공기가 다르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밤이 되면 뚜렷해진다.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무심히 지나쳤던 냄새와 소리가 밤공기에 얹혀 온다. 발자국 소리가 고요한 거리에서 나 홀로 울리고, 도시의 소음은 점점 멀어진다. 그제야 나는 나의 걸음소리를 듣는다. 그 리듬은 왠지 익숙하고 어제의 리듬이 오늘의 나를 이끌었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지친 얼굴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간다. 가방을 무겁게 든 손, 서둘러 걷는 발걸음, 고단함에 웅크린 몸, 그리고 피곤한 눈 사이로 보이는 퇴근의 들뜸. 이 반복되는 풍경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나처럼 그들도 하루의 무게를 견뎠을 것이다. 그 무게가 얼마나 묵직했든지, 결국 모두 각자의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 나는 이 모든 움직임이 마치 하나의 강물처럼 도시를 감싸고 흐르는 것을 본다. 거친 물살도 잔잔한 물결도 결국 어디론가 흘러간다.
달빛이 희미하게 비추는 골목을 따라 걷는다. 바람이 지나가며 남긴 흔적들, 어딘가 들리는 누군가의 낮은 웃음소리, 그리고 한순간 밝아지는 신호등 불빛까지. 이 모든 것이 도시의 호흡처럼 느껴진다.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본다. 그 얼굴엔 묵직한 피로와 더불어, 묘한 안도감이 서려 있다. ‘그래도 하루를 견뎠다’라는 작은 위안이 마음속에 스며든다. 스스로에게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어떤 묵직한 기쁨.
길은 여전히 이어지고, 불빛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멀리 보이는 집의 불빛을 향해 걷는다. 오늘의 흔적들은 발끝에서 묻어나고, 내일의 희망은 발걸음 속에서 움튼다. 고단한 하루 속에서 내가 살아 있음을 깨닫게 하는 이 시간은, 어쩌면 하루 중 가장 진실된 순간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며 가방을 내려놓는다. 작은 바람에도 추운 날, 내리던 빗방울이 그쳤던 날, 혹은 별빛이 맑게 빛나는 날. 이 모든 날의 끝에서 나는 속으로 잔잔히 중얼거린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이 말은 비단 오늘을 마무리하는 한 마디가 아니라, 내일로 이어지는 다짐이다. 반복되는 듯 보이는 일상 속에서도 매번 새롭게 살아가는 나의 기도와도 같다. 오늘을 무사히 보냈음을 감사하며, 내일의 나에게 작은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