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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세라 Jul 06. 2021

아이를 왜 낳고 싶냐는 그의 물음

그와의 대화 1

아이를 원하지 않는 남편과 한 번쯤은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아이를 낳을지를 두고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기만 했을 뿐 대화를 나눠본 적이 많이 없었다.


자기는 왜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기는 왜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시작한 물음은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시작은
세상이 그리 공정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나 : 지향하는 삶?


그 : 응, 아이를 낳는 문제는 현실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미래의 문제이기도 하잖아. 그러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나 : …… 어릴 때는 멋진 인생을 꿈꿨지. 내가 특별한 뭐가 될 줄 알고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었어. (웃음)


그 : 안 봐도 훤하네. 나 잘났다 이랬겠지. (웃음)


나 : 그런데 지금은 그런 삶을 원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아.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주변인으로 사는 것에 조금 익숙해졌거든. 20대 때는 내가 주인공이 되는 줄 알고, 또 주인공이 되려고 이렇게 저렇게 열심히 살았지.


그 : 주인공이 아닌 삶, 주변인으로의 삶?


나 : 주인공이 되려고 했던 노력들이 나에게 결과로 나오기보다는 상처로 남았다고 해도 좋을 거 같아. 그러면서 하나 받아들이게 된 건 ‘세상이 그리 공정하지 않다’는 거야. 물론 지금도 이걸 인정하는 게 늘 힘들기는 하지만.


그 : 공정? 자기야, 갑자기 너무 무거워지는 거 같은데?


나 : 자기, 해리포터 좋아하지? 소설에서 해리포터는 사실 아무것도 한 게 없어. 그냥 유명한 마법사의 아들이었고, 불의의 사고를 당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살아남았고, 그것으로 마법사 세계에서 유명해진 것이지. 태생, 그리고 타고난 재능으로.

헤르미온느는 반대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스스로도 엄청 열심히 공부를 하는 아이야.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 마법학교의 우등생이 되지.

하지만 그래도 결국 주인공은 해리포터. 노력보다는 태생, 운이 어느 정도는 중요한 거야.


그 : 인생은 노력보다는 운이 더 중요하다?


나 : 지금은 덤덤하게 말을 하지만 처음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을 때 말이야. 말 그대로 무식하게 노력만 하다 아무것도 없이 끝나버렸을 때, 며칠을 앓았어.

나는 왜 부유한 집에 태어나지 못했나, 왜 내 부모는 고학력자가 아닐까, 그래도 노력하면 된다고 믿고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만 했는데 왜 늘 나는 실패만 할까. 더 열심히 해야 하나. 나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만 하면 되는 건가? 지금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았나?


그 : 우리가 늘 노출되어 있는 신화이지. “열심히 노력하면 되는 거야. 더 열심히, 더 열심히.”


나 : 그때 딱 하나 잘한 일, “정말 열심히 했다”는 거야. 그 바람에 확실히 알 게 됐거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되는구나. 세상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 좀 더 냉철해지자. 세상은 그리 공정하지 않아.’ 하고 말이야.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어. 공정하지 않아 화가 나서 씩씩대고 있다가 이제는 평온하게 받아들이게 된 거지.

어릴 적 봤던 성공 신화의 주인공들은 개인의 능력만으로 모든 것을 이룬 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운이 더 작용했을 거라는 걸 살아보니 알게 된 거야.


그 : 맞는 이야기인데. 좀 슬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기야, 우리 너무 멀리 온 것 같은데? 아이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말이야.(웃음)


나 : 미안.(웃음) 그런데 내 결혼관, 육아, 뭐 가치관 이런 것들이 이 이야기에서 시작해. 좀만 기다려봐.




평범한 일상에 대한 지향
그 중심이 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 : 참 허무하더라고.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았고, 왜 노력했는지 궁금하더라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모르겠더라고.


그 : 자기에게 깔려있는 짙은 허무주의가 그때 온 거구나.


나 : 맞아. 난 허무주의자가 되어 버렸어.

하지만 반전은 허무하기 때문에 열심히 살자는 거야.


그 : 허무하기 때문에 열심히 살자?


나 : 이상하게 들릴지? 근데 내 결론은 그래. 인생은 허무하기 때문에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야. 결국 나는 먼지로 사라지겠지만 어쨌든 삶은 이어지는 거니까.


그 : 솔직히 나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나 : 지루하겠지만 조금 더 내 이야기해볼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집 앞을 산책하는 일이었어. 그러지 않고는 우울함이 우울증으로 번져버릴 것 같더라고.

걷고 또 걸었지.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주변 소음이 나를 방해하지 않도록 말이야.

그러다 하루는 하늘을 봤어. 그날 날씨가 너무 좋아서 하늘이 청량하게 맑았거든. 그리고 뭉게구름 몇 개가 하늘에 떠다니고 있었고.

그때는 음악도 끄고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계속 하늘을 바라봤어. 주변에 새소리도 들리고, 바람도 기분 좋게 내 볼을 만지고, 햇살은 내 팔을 붙잡고.

그냥 예뻤어. 너무 예뻤어. 내가 보고 있고 듣고 있고 느끼고 있는 모든 게 너무 아름다웠어.

그 순간 갑자기 가슴이 벅차더라고. 숨이 가빠지고.

미안한데..(웃음) 아, 정말 이런 전개 싫은데 말이야. 그래도 있는 그대로 말해볼게.

있지, 나도 믿을 수 없게 그 순간 눈물이 나는 거야. 너무 행복해서.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그때가 처음이었어. 그냥 내가 있다는 사실, 내 존재 자체가 행복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게.


그 : 자기야, 2000년대 감성이야? (웃음) ‘존재 자체가 행복’? 눈물? 역시 자기는 2000년대 감성이다.(웃음)


나 : 그래 웃어라, 웃어. 나도 웃겨.

아무튼 그때는 그 순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더라고. 근데 시간은 흐르고 있고 구름은 떠나가고 나를 스친 바람도 이미 없어지고.

그냥 그 순간, 그 자체가 너무 소중했어. 내가 숨을 쉬고 바람을 느끼고, 눈으로 하늘을 보고, 새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렇게 살아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하더라고.

언젠가는 나도 구름이나 바람처럼 사라진다는 사실이 내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너무 아파왔는데 그럴수록 그 순간이 고맙고 행복하더라고.

나는 그 순간에 존재하는 거였어. 지나가버린 그 순간에.


그 : 네가 그때 진짜 감수성이 풍부해있었구나? (웃음) 지금도 눈이 촉촉해진다.


나 :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그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조금 뛰어. 다시는 느끼지 못할 그 순간이라는 게 아쉽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순간이 있어서 지금도 고맙고 감사해.


그 : 너를 처음 봤을 때 네 눈에서 본 어린아이 같은 감성을 내가 잘못 본 게 아니구나. 말투도 차갑고 다가가기 어려웠지만 네 눈은 절대 차갑지 않았거든.


나 : 그건 모르겠다.(웃음) 어쨌든 그때 알았어. 내가 그때까지 지향했던 성공과 명예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이야. 죽어서 아무도 기억 못 하는 그따위 것에 나를 가두지 말자고. 나를 꾸미는 미사구에 보였던 집착을 내려놓게 되었어.

어쨌든 난 이미 인생의 경로를 잘못 잡은 멍텅구리이고 그 경로에서 마저 이탈되고만 루저이지만 내 인생은 끝난 게 아니라고 말이야.

그보다는 이런 평범한 일상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어. 평온함 속에 오는 고요한 행복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 중요한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바로 가족이지 않을까. 생각한 거지.

더 사랑하고 싶었어. 내 주변 사람들을.

나는 종교가 없지만 그때 예수님, 부처님이 생각나더라. 사랑 그리고 자비. 사랑과 자비로 이 세상을 살아가자고 말이야. 웃기지?


그 : 목사님, 스님 다 되셨구먼. (웃음)


나 : 그때 친구들 만나면 산속에서 도 닦고 있냐고 그러긴 했어. (웃음)


(잠시 침묵)


나 : 내가 결혼을 하기로 한 것도 아이를 가지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 이후의 일이야.

비혼주의자였던 내가 결혼을 하기로 한 것도,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었던 것도, 모두 사랑하고 싶어서. 온전히 사랑하고, 또 사랑을 받고 싶어서.

어차피 사라질 먼지 같은 인생이라지만 어차피 살 거라면 사랑하면서 살다가 후회 없이 가고 싶어서.

그래서 가족을 만들고 싶었어. 자기와 나만의 둘 뿐인 가족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 또 다른 존재인 아이와 함께 하는 가족 말이야.




자기는 아이에게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어?



그 : 자기야, 정말 긴 이야기다. 자기가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 이렇게 오래, 그리고 깊게 생각해 왔는지 몰랐어.

하.. 정말 어려운 문제다.

자기 말 다 이해가 돼. 나도 가족과 살면서 느낀 유대의 감정은 지금도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니까.

하지만 그게 과연 사랑이었을까. 혈연과 본능에서 나온 어쩔 수 없는 감정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집착은 아니었을까.

서로 의지할 수 있고 대등한 힘을 가진 자기와 나 사이에서 느끼는 사랑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를 의지하고 수직적인 관계가 될 수밖에 없는 아이와 나 사이에서 필수적으로 들게 되는 ‘희생과 통제'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아이에게 사랑을 받기 전까지 무조건 보여야 하는 내 노고와 희생을 거치고 나면 우리는 온전하게 아이를 사랑해 줄 수 있을까? 또 다른 집착은 되지 않을까?


자기는 아이에게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어?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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