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포리아> 크리스마스 &뉴 이어 스페셜 에피소드
* 아래 글은 문학 플랫폼 던전에 2021년 8월 9일 처음으로 공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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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부머 세대가 되어가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으로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요즘 애들은 도대체 뭘 보면서 자라나? 좋은 미디어를 보면서 자라고 있나?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정확한 알고리즘 덕분에 내 유튜브 피드에는 보이지 않지만, 가끔 보거나 들리곤 하는 정신 사나워지는 유튜브 컨텐츠를 접할 때면 이런 걱정을 하곤 한다. 하지만 모든 세대가 다음 세대를 걱정하는 법이며, 늘 그렇듯 이런 걱정은 쓸모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밑 세대의 일원들도 다 생각이 있는 법이다. 자기들 취향에 맞는 좋은 이야기를 찾아낼 것이며, 없다면 자기네들이 만들어 낼 것이다. 내 바로 윗세대가 환장한 영국의 <스킨스>(2007-2013) 시리즈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 아닌가.
이번에 이야기할 HBO의 <유포리아>(2019~) 시리즈가 <스킨스>에 종종 비교되곤 한다. 다루고 있는 주제가 섹스, 마약 등 과격하다는 사실이 물론 대표적인 공통점이겠지만, 이런 틴에이저 드라마는 <가십걸>(2007-2012), <글리>)(2009-2015) 등 쌔고 쌨다. <유포리아>와 <스킨스>에 청소년 관객이 특히나 호응하는 이유는 굳이 이 드라마 내용이나 전개 자체가 현실적이라기보다, 해당 시기 청소년들의 정신 상태를 잘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특유의 광기에서 나오는 에너지. <스킨스>도 그렇고 <유포리아>도 그렇고, 연속으로 몇 회차를 보고 나면 머리를 몇 대 맞은 듯 어지럽고 얼얼해진다.
여하튼 <유포리아>에서 다루고 있는 수많은 시의적절한 주제 중에서도 그것을 공통으로 엮을 수 있는 키워드는 단언컨대 정체성이다. 보잘것없는 싸구려 드라마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청소년들의 관심사는 어느 대학에 가는지 내 성적이 몇 등급인지가 아니다. 우리나라처럼 아무리 입시에 미쳐있는 곳에서도 고등학생 정도 되면 학생들은 이 세계에서 나는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 나는 왜 사는지를 고민한다. <유포리아>의 주인공 루(젠데야)와 줄스(헌터 셰이퍼) 또한 각자 이런 고민을 하는 인물들이다. 크리스마스와 신년을 앞두고 루는 끊었던 약물을 다시 남용하기 시작했으며, 줄스는 MTF(male to female) 트랜지션을 거치는 중에 있다.
루의 이야기를 다루는 크리스마스 스페셜 <힘든 일은 언젠가 끝난단다 Trouble Don’t Last Always>에서 루는 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아저씨 알리와 함께 다이너 식당에서 팬케이크를 먹으며 대화를 나눈다. 루는 알리에게 자신이 ‘삶의 균형’을 찾았다고 둘러대지만, 알리는 루가 그저 약을 끊을 마음이 없을 뿐이라는 사실을 간파해낸다. 알리는 중독이란 병이며, 흑인들이 취하고 유약한 상태에 있도록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마약을 공급해온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곤 대화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흑인으로서 현재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로 흘러간다. 루는 자신이 엄마를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을 만큼 가치 없는 인간이라서 얼마 더 살지 않을 인생 동안 약을 끊을 마음이 없다고 말한다. 알리는 이렇게 포기하는 것이 너무 쉬운 것이라고 말한다. 힘이 드는 것은 혁명이다. 너나 할 거 없이 모두가 혁명가인 요즘 세상에 진짜 혁명은 다른 게 아닌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spiritual 것이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믿어야만 한다. 너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를. [...] 시를 믿어야만 한다. 왜냐면 그 외의 것들은 전부 너를 실망시킬 거거든. 너 자신을 포함해서.
But it is imperative that you believe in something. Something greater than yourself. [...] You’ve got to believe in the poetry. Because everything else in your life will fail you. Including yourself.”
줄스의 이야기를 다루는 <바다 덩어리가 아닌 사람들은 전부 엿이나 먹어 Fuck Anyone Who’s Not a Sea Blob>으로 넘어가 보자. 줄스는 알리 아저씨가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시’를 믿는 인물이다. 줄스는 정신 상담사에게 호르몬 약을 그만 복용하고 싶다고 말한다. 상담사가 트렌지션을 멈추고 싶은 것이냐 묻자 줄스는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은 한평생 남자를 중심에 두고 여성성을 구상해왔는데, 여성성을 정복하려다 보니 이런 여성성이 자신을 정복한 것 같다고 증언한다. 줄스는 트랜지션을 위해 팔에 이식한 남성호르몬 조절 칩을 가리키며 사춘기에 관하여 말한다.
“[...] 저는 항상 사춘기를 넓어지는 것, 깊어지는 것, 혹은 굵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무서웠던 것 같아요. 왜냐면 제 머릿속에서는 여자는 항상 작고, 가늘고 섬세하고... [...] 근데 사춘기가 오면 저는 결국 그 반대편에 가있을 것만 같았어요. 거기에 갇힌 상태로. [...] 하지만 그러면서도 넓고, 깊고 굵은 다른 아름다운 것을 떠올려 봐요. 저는 바다가 떠올라요. [...] 가끔 바다에 기도를 해요.
적어도 저에게 트랜지션은 항상 정신적인 것이었어요. [...] 저는 절대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아요. 저는 살아있고 싶어요. 아니, 애초부터 살아있기 위해 시작한 거예요."
"[...] I’ve always thought of puberty as, like, a broadening, or a deepening, or like a thickening. Which I think is, like, why I was always so scared of it, you know? Cause in my head, women were always, like, small and thin and delicate, and... [...] And, you know, that, like, when [puberty] happened, I’d just, like, end up on the other side. Like stuck. [...] but then, I think about beautiful things that are also broad and deep, and thick, and I think of... something like the ocean. [...] Sometimes I’d pray to the ocean.
At least for me, being trans is spiritual. [...] And I don’t ever want to stand still. Like, I want to be alive. I mean, that ‘s what this has always been about, is, like... staying alive.”
줄스는 살아있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믿어야만 하는 시가 무엇인지 이미 파악하고 있다. 줄스는 알리처럼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여성이 되어가는 과정의 ‘시’를 믿는다. 삶의 목적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삶을 경험하는 것의 문제이며, 그것은 줄스 자신보다 훨씬 크다.
루의 이야기는 비 내리는 트럭 차창 밖에서 비친 루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면서 끝난다. 어린 나이에 연기 경력이 상당한 젠데야는 <유포리아>로써 젊은 흑인 여성 아이콘의 위치에 등극했다. 나는 젠데야의 우는 얼굴을 가까이서 잡은 이 클로즈업을 보면서 백인을 가장 아름답게 잡는 데에 특화된 고전 할리우드식 조명과 미장센을 떠올린다. 한편 헌터 셰이퍼의 떡 벌어진 어깨, 큰 가슴, 작은 엉덩이 등이 이루는 곡선을 보면서 여성성에 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한편 최근에 헌터 셰이퍼가 일본 메이크업 브랜드 시세이도의 광고를 촬영했는데, 동양인 여성의 미의 기준이 되는 ‘백인 여성’으로 패싱 passing 되는 그녀를 보고 일본의 일반 대중은 어떻게 생각할까, 생각해본다. 여성성은 그녀의 말대로 바다처럼 계속 움직이는 것일까. 그리고 이런 젊은 배우들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똑같이 피어나고 있는, 혹은 나중에 피어날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너희도 나도, 우리는 시를 믿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