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2018)와 영지 선생님
* 아래 글은 디지털 문학 플랫폼 던전에 2021년 8월 30일에 처음으로 공개되었습니다.
https://www.d5nz5n.com/work/82/episode/1705
내가 영화를 반복해서 본다면 그것은 내가 이해하기 힘든 감정선이 있어서이다. 예를 들어 나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을 약 열 번의 재감상을 거치고 나서야 갑작스러운 컷으로 연결된 주인공의 시선과 의도를 이해하게 되었다. 한편 <벌새>(2018)는 아직도 내게 미스터리로 남는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보다 (어떤 면에서는) 내게 훨씬 가까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다. 서울에 사는 열댓 살 소녀가 느끼는, 모든 것이 내 통제 바깥에 있다는 무력감과 혼란을 정확하게 짚어내면서 이런 일이 벌새만큼 작은 소녀에게 내려앉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이한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이런 신비로움 때문인지, <벌새>는 90년대 한국의 신화와도 같다는 소개를 받으면서 온갖 방면으로 이야기되었다. 90년대 배경의 나름 시대극이다 보니 노스탤지어 혹은 세대 측면에서도 논의되었고, 90년대에 활동한 에드워드 양과 같은 동아시아 감독의 영향이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윤가은이나 윤단비 감독과 함께 논의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한국사회에서 소녀로 성장하는 경험을 탁월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2010년대 후반에 나타난 다른 독립-여성영화와 함께 영화관을 자주 드나드는 페미니스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한편 <벌새>는 전에 없던 적나라한 (동시에 상당히 공감 어린 시선의) 남성 캐릭터 묘사로 인하여 꽤 심한 백래시를 받았다. <벌새>가 정식 개봉하기 전부터 왓챠 코멘트란을 정기적으로 체크한 사람으로서 특히 기억에 남는 코멘트가 있는데, 그것은 <벌새>가 피해의식에 절어진 한국 여성이 만든 영화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주인공 은희의 가족이 대치동에서 사는데 오히려 흙수저 코스프레를 하고 있고, 이 영화에 나오는 남성 캐릭터는 모두 악당으로 묘사했다고 주장한다.
예전에는 이런 댓글을 보고 바로 분노에 휩싸였다면, 첫 관람으로부터 어언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 생각을 해보자니 이 영화에 대한 나의 반응 또한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물론 나는 위 댓글을 남긴 (아마) 남자와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저런 댓글을 남긴 사람과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을 밟으며 같은 영화를 보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방금 ‘한국사회에서 소녀로 성장하는 경험을 탁월하게 묘사했’다고 말한 것을 달리 해석하자면 그것은 나의 경험을 비슷하게 묘사했다는 뜻이다. 서울에 살면서 사회경제적 계급 상승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똑같이 열심히 공부한 (혹은 열심히 노력한) 중산층 계급 여성의 성장 이야기를 잘 담아낸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한국이십대남자만 공감할 수 없는, 보편적 한국 여성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 비평계에 있는 여성 기자들이나 독립 영화관을 여가 시간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는 여성 관객의 공감을 특수적으로 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벌새>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위대한’ 영화감독들이 적당히 가방끈이 긴 인간들을 상대로 영화를 만들었다. 우디 앨런, 페드로 알모도바르, 박찬욱 등등. 거의 남자들이다. <벌새>는 우리가 성인이 되어, 심지어 그때 그 순간에서조차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 말한다. 집안 남자들의 폭력, 나를 보호해야 하는 어른들의 무시와 협박, 선생님이나 여자 친구들을 향하여 피어나는 감정 등 말이다. 이런 것에는 찢어질 듯한 고통이 따르는데, 은희나 우리 모두 덤덤하게 상처를 아물게 둔다. 은희가 언니와 함께 새벽녘 부러진 성수대교를 보듯, 우리는 <벌새>라는 공동체적 신화를 숭고한 분위기 속에서 목격한다.
<벌새>를 둘러싼 하고 많은 이야기 중에서 그리 많이 논의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영지 선생님이라는 캐릭터이다. 담배 피우는 뒤태로 처음 등장하는 영지 선생님은 김새벽이 연기한다. <벌새> 이전에는 김새벽을 <초행>(2017)과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에서밖에 보지 못했다. <초행>에서 김새벽이 아파트 계단의 창가에서 카메라를 등지고 서있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는지, <벌새>에서도 계단 창가에서 뒷모습으로 등장하는 영지 선생님을 보고 김새벽임을 알아챘다. 한문 선생님이 입을만한 셔츠와 청바지가 참 잘 어울리는 뼈마디를 가진, 한국 영화계의 여배우 중 드물고 귀한 배우이다.
사실 영지 선생님의 존재는 <벌새>가 비판받는 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은희가 친구와 다퉈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하여 영지 선생님은 노래를 불러준다. 여기서 선생님이 부르는 노래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을 잃은 청년 노동자의 시점에서 부른 노동요이다. 이런 것이 영지 선생님의 긴 휴학을 설명해준다. 한편 영지 선생님은 ‘그렇게 좋은 대학’을 다니며 은희가 사는 작은 아파트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의 주택에서 산다. 이런 영지 선생님의 존재를 담은 <벌새>를 비판하는 이들은 영지 선생님을 비롯한 운동권 세대의 모순과 감독의 부주의를 지적한다.
하지만 나는 영지 선생님과 <벌새>라는 영화 모두 이 모순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지 선생님의 그리 많지 않은 대사 중 그녀의 모놀로그에 해당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은희야,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영지는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다는 사실, 그리고 “함부로 동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운동권 활동을 시작한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영지는 세상이 힘든 곳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동시에 영지는 세상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안다. 이 또한 그녀의 유복함에서 나오는 여유일 수 있지만, 어찌 됐건 영지는 대치동 한복판에 있는 한문학원에서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이는 얼마나 있겠는가”를 학생에게 묻는 사람인 것이다. 영지는 은희를 이 세상을 같이 살아갈 사람으로 봐주는 첫 번째 사람이다.
영지는 위험한 인물이기도 하다. 선생과 학생 사이에 응당 지켜야 할 선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왓챠의 ‘바이츠’님이 코멘트에서 지적했듯이,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에게 경어를 사용하던 영지는 은희가 단짝 친구와의 관계로 울음을 터뜨렸을 때, 그녀에게 우롱차를 내어 주며 대화를 시도하던 순간에 말을 놓는다.” 이는 “[...] 모르는 사람의 호의가 개인의 자장(磁場)으로 파고 드는 조금 따뜻하고 또 조금은 섬뜩한 과정”이다. 영지 선생님이 은희의 병실을 밤늦게 방문할 때, 은희를 바라보는 김새벽의 지긋한 눈빛과 은희의 머리를 쓰다듬는 김새벽의 핏대가 선 마른 손목으로부터, 영지가 선생의 영역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는 은희로부터 이 묘한 관계의 동지를 앗아가 버린다. 꽤 잔인한 영화다. 은희에게 처음으로 ‘나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고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준 사람이 94년도 서울에 발생한 비극으로 인해 사라진 것이다. 영지의 존재는 내려앉은 성수대교의 잔재, 그리고 은희의 찢어진 고막으로 남는다. 끊어지고 찢어지는 고통으로 남는다. 한편 영화는 영지의 약속을 가장 마지막 장면까지 남겨놓는다. 영지는 은희에게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다우며, 다음에 만날 때는 그 모든 것을 알려주기를 기약한다. 하지만 영지는 더 이상 알려줄 수 없기에, 이는 상처를 간직한 은희가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하는 숙제로 남는다.
<벌새>의 제목이 왜 ‘벌새’일까 참 고민을 많이 한 것 같다. 벌새의 어원에 힌트가 있을까, 영화 속에 힌트가 있을까 열심히 찾아봤다. 하지만 그저 벌새의 모습을 떠올리면 되는 문제였다. 작은 몸통으로 열심히 날갯짓하며 공중을 나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