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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디 Jul 21. 2020

엄마의 노동에는 이름이 없다

부너미의「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를 읽고



나는 결혼을 심각하게 고민해본 일이 없다. 나에게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면 하지 뭐. 딱 이 정도의 무게다. 그래서인지 기혼자일지 아닐지 모를 나의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우리 엄마는 헌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왜 우리 엄마는 아무개의 어머니처럼 다정하지 않은 건지, 드문드문 지나치게 시니컬한 태도에 서운하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정함과 헌신은 짝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정에 헌신하는 (다정한) 어머니가 있는 친구를 부러워했던 때가 있었다. 책을 읽으며 엄마가 가족에게 할애한 많은 것들과 내가 그것을 외면하고 살았음에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집안일을 ‘비교적’ 많이 ‘돕고’, ‘가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아빠를 은근 자랑스럽게 여겼다. 반면에 엄마의 노동은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우리 엄마의 노동에는 이름이 없다.


시집가서 많이 하라며 설거지를 못하게 했던 엄마는 이제 결혼하지 말고 혼자 즐겁게 살아가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설거지를 맡기지 않는다. 엄마는 그렇게 여전히 집안일을 도맡아 하신다. 몇십 년 째 바깥 일을 병행하면서.


<여자들의 서재>를 읽으며 엄마가 또 생각났다. 동생이 태어나고 늘어난 짐들 탓에 집이 좁아져 책들을 버리면서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거 다 엄마가 읽은 책이라고. 나는 엄마가 그 말을 하기 전에는 그 책들이 당연히 아빠 책인줄 알았다. 그 후 이사를 앞두고 짐을 한 번 더 정리할 때에는 베란다에 가득했던 엄마의 화분도 다 버렸다. 그렇게 엄마의 공간은 사라졌다.


주기적으로 딸에게 비혼을 권유하는 엄마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우리 엄마는 책 속의 페미니스트처럼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생각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한국의 중년 여성이다. 가부장제의 불합리가 익숙하다 못해 삶 그 자체일 엄마가 꿀 수 있는 꿈은, 딸이 본인처럼 살지 않는 것이다. 나는 엄마의 그 기대에 부응할 것이다. 비혼을 다짐하는 것이 아니다. 결혼하게 되더라도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못할) 것이다.


이 책은 엄마와는 다를 내 결혼의 밑그림을 그려보게 했다. 기혼자가 되어있을지도 모를 미래의 내가 해야할 일을 생각했다. 특히 <아들과 함께 젠더 경계 허물기>에서는 양육자로서의 내 역할이 개인-가정-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 무게를 다시 한 번 가늠케 하였다.


글을 마무리하며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자신의 삶을 찾기위해, 그리고 페미니즘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들을 응원한다.


2020-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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