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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Jul 17. 2023

뉴질랜드 이민 | 갑질주의 | 외노자 현실 | 인간극장

부당해도 참아야 하느니라……

부슬부슬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뉴질랜드의 겨울은 스산하다.


아이들이 아침부터 민들레를 꺾어왔다.

창문 틀, 아스팔트, 바위 틈까지.

바람이 이끄는 대로 뿌리를 내린 민들레의 모습이,

생존과 불안의 경계에서 하루를 버티고 있는 이민자의 삶과 닮았다.


나는 뉴질랜드 이민자다.

홀로 아들넷을 데리고 이곳에 온 지도 3년반이 되었다. 

작년에 졸업해서 드디어 취업비자를 받았는데,

이 비자를 받기 전까진 매년 비자를 연장해야 했다.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불안함.

아직도 나는 주거에 대한 불안과 함께 하루살이처럼 살고 있다.

최근 뉴질랜드엔 새로운 영주권 제도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내게 영주권은 먼 나라 이야기…


(이번 발표가 제 영주권 신청에는 해당되지 않는 거죠?

가장 빠른 방법이 결국에는 2년 경력을 채워야 하는 것뿐이네요. 

다른 방법이 있을지 좀더 기다려볼 수밖에 없겠어요.

정말 고마워요.)


타국에서 외노자로 사는 건, 쉽지 않다.

모두가 평등한 나라, 소수의 권리도 보장되는 나라.

보통 뉴질랜드를 이렇게 떠올리지만,

실상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외노자의 삶이란 수많은 부당함을 삼켜야 하는 삶이다.


오늘도 청소로 하루를 시작한다.

엄연히 나는 뉴질랜드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등록 교사이지만,

근무시간을 줄였다는 이유로 원장은 부당한 일을 요구한다.


아침에는 베이비반, 점심에는 토들러반, 오후에는 프리스쿨 반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돌려 막기를 하고 있는 어중이 떠중이 신세가 되었다.


하루에 청소를 3번이나 하는 날에는 정말이지 진이 빠진다.

그런데도 쉬는 시간이 없다.

뉴질랜드는 법적으로 오전, 오후 쉬는 시간이 있지만,

이 센터는 쉬는 시간조차 없이 화장실에도 간신히 가고 있다.


병가도 그렇다.

일년동안 열흘의 병가를 받지만,

나는 지난 8개월동안 단 두시간의 병가를 썼다.

아이가 고열이 올라 학교에서 전화를 받은 바로 그 날 뿐이었다.


나는 화장실에서 숨죽여 울고 있는 동료를 몇 번이나 보았다.

병가를 쓰는 것 때문이었다.


등원하는 아이들은 정해져 있는데, 

병가를 쓴다고 추가 인력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병가를 써도 승인을 해주지 않아서 급여를 받지 못하는 날도 허다하다.

결국 병가를 쓰는 사람, 쓰지 않는 사람, 모두가 피해를 봐야 한다.

뉴질랜드에도 직장 눈치는 살아있다.


나도 이곳에서 부당함을 많이 겪었다.

올해초에는 휴가를 쓰지 않았는데도 일주일간 나에게 일을 넣어주지 않았다.

휴가를 쓰지 않았기에 근무일에 맞춰 한국에서 홀로 비행기를 타고 왔건만,

근무 스케줄에는 내 이름이 없었다.


다급하게 원장에게 전화해보니 그녀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녀는 자신이 휴가 중이니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결국 아무 답변도 받지 못한 채 그 한주를 몽땅 날렸다. 물론 급여도 받지 못했다.


한국에서 일주일을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보낼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

그녀에겐 가족과 함께 보내는 자신의 시간만 귀중하고,

삼 년 만에 고국을 찾은 어느 외노자의 삶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쉬는 시간, 병가도 쓰기 힘든 이곳.

일이 없을 땐 마음대로 일도, 급여도 주지 않는 이곳.

그러나 교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너무 많다.


이 센터는 두세달에 한 번씩 가족들을 초대해 유치원 행사를 여는데,

나는 한 번도 추가 근무에 대한 급여를 받은 적이 없다.

열정페이도 아니다. 그야말로 노동착취의 현장이다.


지난주에도 그랬다. 

밤 8시가 넘은 시간까지 커리큘럼에 대한 학부모 간담회가 있었다.

자연에서 뛰어놀며 이곳의 학부모들은 

자녀의 공부에 대한 기대가 없을 것 같지만,

고작 서너 살 아이를 둔 학부모인데도 간담회의 열기는 대단했다.

부모가 된다는 건 만국 공통의 일이다.


이번 주에는 학부모 상담이 있었다.

상담에는 엄마와 아빠, 모두 자리에 온다.

원어민 현지인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는 자리에 선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이 상담을 위해 꼼꼼히 아이들의 발달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PPT까지 만들어 준비했지만 준비 시간에 대한 페이는 받지 못했다. 


이번에도 빠짐없이 급여요청서에 추가근무 시간을 적어본다.

그러나, 고요속의 외침.

외노자의 가녀린 목소리는 공기중에 산산조각이 되어 산화되어 버린다.

이민자의 삶은 부당해도 참아야 하는 것의 연속이다.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비자 때문이다. 

취업비자는 보통 고용주의 스폰을 받는 비자이기 때문에 

고용주와 맞선다는 게 다윗과 골리엣의 싸움일 뿐이다.

분명한 갑과 을.

나는 이렇게 오늘도 갑질의 횡포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오늘은 아이들 학교에도 상담이 있는 날이다.

아직도 영어가 서툴지만 씩씩하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삼둥이,

(영상)


이제는 원어민만큼 영어실력이 늘어난 자랑스러운 큰애는,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있는 자신감 있는 아이다.

큰애는 올해만 두번의 상을 받았고 글쓰기 워크샵에도 초청받았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상장도 몇차례 받아올 정도로 학교에서 인정을 받고

다들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 아이들이 나는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그리고 대견하다.


하나하나 신경 써주지 못하는 못난 어미이지만, 

고난보다 우수한 교육은 없나 보다.

아이들은 힘든 엄마의 삶을 이해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 스스로 한다.

어리광부리지 않는 아이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시리다.


집에 오니 허리가 더 아프다.

허리디스크를 앓고 있는 나에게 허리통증은 고질병이다.

사실 나는 허리디스크 때문에 이 일을 얼마나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덤덤하게 허리 복대를 찬다. 누워있으면 내 일을 대신해줄 사람이 없다.

설거지옥.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다.

대학병원에서 처방받은 수개월치의 허리약들,

디스크 약을 서둘러 삼킨다.


지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니 큰애방에서 공부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엇에 홀린 듯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본다.


황홀경.

아이의 모습이 눈이 부셔 어릿어릿할 정도로 찬란하다.

그녀의 눈꺼풀은 어느새 흰자위가 훤히 보이며 하늘을 향해 있고,

콧구멍은 벌렁벌렁 황홀 속에 빠져들었다.


그래. 인생 뭐 별거 있나.

자식 때문에 사는 거지. 

 뉴질랜드에 핀 민들레 한 송이, 그녀는 그렇게 다시 대지를 처절하게 움켜잡는다.


https://youtu.be/24OkOMcAl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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