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동안 말 섞지 않던 엄마와 화해를 했다
100년 만의 가장 큰 달이 뜨는 추석이랬다. 달의 부피가 늘어날 리 없으니 100년 만에 지구와 달이 가장 가까이 위치한다는 뜻일 테다. 그래도 태어나서 본 가장 큰 달일 거야, 앞으로도 없을 달이야, 라며 밖으로 나가자 채근했다. 어지러운 전깃줄 없이, 가리는 건물도 없이 더 가까이서 세기의 달을 봐보자고 말하며 바다 가까이 가는 걸음을 재게 놀렸다. 막상 바닷가로 내려오니 보름달이 구름에 숨어 깜깜했다. 둥근 얼굴이 다시 내비칠 때까지 나란히 선착장을 걸었다. 작은 고기잡이배들이 열을 지어 서 있고 중간중간 빈자리엔 낚시꾼들이 앉았다. 미끼로 쓸 새우는 박스 한가득한데 잡은 물고기를 집으로 가져갈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손바닥만 한 생선이 잡히는 족족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닥에 툭 던져놓는다. “이게 뭐지?”하고 허리를 기울여 혼잣말처럼 묻는 말에 상대방도 “전갱이요”하고 바다를 향한 얼굴을 돌리지 않고 답한다. 차 밑에 숨어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새끼고양이들이 쪼르르 달려와서 전갱이를 물어갔다.
달이 다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급히 봐두었던 하얀 배 옆으로 서서 신발을 벗고 춤을 춘다. 하나레이 만(bay)에 빛나는 달이 비추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추는 춤이다.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전에 앞에 쪼그려 앉아 영상을 촬영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웃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영상 촬영에 아주 진심이었는데 여자는 영상 촬영을, 남자는 그 옆에서 노래 트는 것을 담당했다. 낮에 할머니 앞에서 재롱 잔치할 때 옆에서 훔쳐보며 활짝 웃던 얼굴이 지금은 집중하느라 잔뜩 구겨졌다. 그 모습이 조금 귀여웠다. 꿇고 앉은자리에서 살짝 중심을 잃어 기우뚱하기도 하고 촬영하는 핸드폰에서 음향이 멀리 들릴까 봐 무릎을 굽히고 서로에서 꼭 붙어 서 있다.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흩트리고 손으로 둥근달을 만들며 춤을 마치자마자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서 말한다. “다리가 길게 나오게 하려고 이렇게 찍었어, 한 번 봐봐.” 결과물이 마음에 든다, 잘 나왔다고 하자 금세 뿌듯한 표정을 하곤 당당한 걸음걸이로 집을 향해 몸을 튼다. 달구경 따위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보면 단란한 가족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영상을 찍어주는데 그토록 열심인 엄마와는 2년 만에 말을 텄다. 아빠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1년 정도는 얼굴을 피했다. 그 시절 나를 괴롭히던 관절 시림이 두 사람을 볼 때면 손목을 넘어 고관절과 골반까지 스멀스멀 뻗쳐왔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엄마의 이야기, 끊이지 않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다른 성장배경을 가진 남자와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고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나와 동생을 귀하게 키우려고 어떻게 혼자만의 사투를 벌였는지, 그렇게 노력한 결과로 우리가 훌륭하게 자라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외롭고 불행하며 손에 남은 것이 없는지를 20년 동안 놀랍게도 똑같이 반복했다. 32살의 나는 맞장구를 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초등학교 4학년이 감당하기엔 힘든 이야기였다. 오랫동안 쌓인 독은 직장 스트레스와 합쳐져 원인을 알 수 없는 관절 시림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밤에 악 소리를 지르며 깰 만큼, 도끼가 있다면 손목을 잘라내고 싶을 만큼 괴로운 일이었다.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엄마의 레퍼토리도 20주년을 맞이했지만 글쎄. 시린 관절로는 더 이상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멀찍이 둔 거리가 도움이 됐다. 심리상담 중 엄마를 입에 올릴 때 더 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게 되기까지 1년이 꼬박 걸렸다. 그러고도 얼굴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를 트게 되었을 때, 훌라가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할머니 앞에서 훌라를 추는 나를 보며 “그때 여경이가 다니던 유치원 이름이 뭐더라?”, “코닥 훌라 쇼에서 춤췄던 거 기억나니?” 같은 이야기가 오갔던 것이다. “훌라 클래스를 운영할 때 활동명을 뭐라고 할까?”라고 물으면 와이키키에서 10분 거리였던 집이 위치했던 거리의 이름을 구글맵으로 찾아보면서. 애정으로 가득 차고 증오가 덕지덕지 묻어있을 수밖에 없는 엄마와의 줄다리기에 여전히 목덜미가 뻐근해지지만, 당분간은 이 줄을 붙잡고 있을 생각이다. 내가 살고 엄마가 살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관계도 살아있길 바라니까. 그런 마음으로 엄마에게 영상 촬영을 핑계 삼아 달밤을 보러 나가자 청했다. 엄마는 아빠에게도 물어보라며 넌지시 권했다. 그렇게 셋이서 여수 밤바다를 향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