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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구르르 Mar 01. 2024

시작은 샤워

우울은 수용성이니까

매일같이 샤워를 할 수 있는 요즘이 소중하다고 썼더니 연락이 여럿 왔다. 그럼 평소에는 매일 씻지 않는 거냐고. 그러게. 나도 아침저녁으로 씻는 게 별 일이 아니었던 때가 있었다. 내 샤워뿐 아니라 애 둘, 셋의 샤워까지 챙기던 시절도 있었다. 근데 5년 전 삶의 한 부분이 무너진 이후로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쯤 샤워를 건너뛰어도 티가 안나는 데에는 재택 위주의 근무환경이 한몫했다. 하루 종일 집 밖을 나갈 일 없이 눈곱도 떼지 않고 침대와 컴퓨터 앞만 오갔다. 어떤 이는 걱정을 담아 목욕탕을 추천해 주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향긋한 바디워시를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입만 살아 매일 같이 놀려대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내가 좋아하게 된 사람이다.

배스앤바디웍스의 VIP라는 그는 내가 매일 샤워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는데(도대체 왜?) 그 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샤워 위원회가 열렸다. 그 질문이 시와 때를 가리지 않아서 야근을 할 때에도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샤워는요?’, 수업을 하러 갈 때에도 ‘수업 잘하고 오세요. 샤워는 했죠?’하는 식이었다. 누군가 나의 샤워 여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묘하게 신경이 쓰이는 일이라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샤워계획을 짜게 되었다. 그는 샤워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사실을 의아해했으나 샤워를 안 하는 것보다야 나았으므로 일단은 받아들이는 듯했다.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도 샤워에 대한 질문은 불쑥불쑥 튀어나왔으므로, 소파에 누워있다가도 옷을 벗고 물 밑에 서는 날들이 쌓여갔다.

샤워를 하는 데 걸리는 로딩이 짧아진다는 건 다른 일들을 하는 데에도 속도가 붙었다는 뜻이다. 웬만하면 헤어드라이기를 쓰기보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자연스레 머리가 마르기를 선호하는 편인데 그동안 없던 여유 시간이 생긴 기분이었다. 미뤄뒀던 설거지나 빨래 개기, 책상 위의 잔정리를 하고 나면 몸도 집안도 말끔해져 있었다. 침대에 누워 물기를 머금어 보들보들해진 뺨을 양손으로 잡아보면, 오늘 하루도 썩 나쁘지 않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에 하루빨리 가까워지기만을 바라는 삶에서 내일의 샤워를 계획하는 삶으로의 변화는 꽤 큰 것이라 어느 새부터 세 번의 박수 이모티콘으로 샤워를 칭찬해주는 그의 연락을 기다리게 되었다.

고백을 할 때에도 당신의 어떤 모습에 반했어요,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매일 샤워하는 제 모습이 좋아요,라고 말했다. 그는 연애할 생각이 없음을 여러 번 명확히 말했으므로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내 몫이 아니었다. 다만 샤워를 해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곧바로 일어나서 옷을 벗고 온도를 맞추고 물을 맞고 머리를 감고 곳곳을 비누칠하고 공들여 콧방울을 닦은 후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는 일련의 과정을 행할 수 있게 된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두려웠다. 지금 그가 사라져 버린다면 다시 샤워를 하지 않게 될까 봐, 아직 혼자서는 샤워를 할 만큼 마음이 단단해지지 않았을까 봐. 그래서 지금이 좋아요, 더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에요, 하고 붙잡았다. 다행히 그는 샤워 여부만은 꾸준히 물어봐주었다.

아파서 끼니도 거른 날은 빼고서, 매일 샤워를 한지 꼬박 두 달이 되어간다. 시작은 단 한 번의 샤워였지만 그 이후에는 더 많은 일들이 수월해졌다. 격주에 한 번씩 연달아 세 시간씩 훌라를 추는 것도, 아침 9시에 칼 같이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는 것도, 그로부터 8시간을 할애해서 일이 되게끔 만드는 것도. 내일과 모레의 샤워 계획을 세우면서 더 먼 미래의 일들도 계획하기 시작했다. 3월엔 도쿄, 4월과 5월엔 하와이, 6월과 7월엔 교토. 샤워 여부를 물어봐주는 그의 행로를 따라 비행기 표를 예약하면서 그때까지는 매일 샤워할 수 있겠거니,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도 침대에 들기 전 따뜻한 물로 먼지와 함께 몸 곳곳에 엉겨 붙어있던 슬픔을 씻어낸다. 습관처럼 한 켠에 자리 잡았던 우울이 라벤더 향 거품에 조금씩 옅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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