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닥꼬닥 혼자 걷는 올레길 1코스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오늘은 바로 제주로 떠나는 날이다. 혼자서 여행하는 건 이전에도 종종 해봤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 혼자 있는 것은 처음이라 두려우면서도 설렜다. 미지의 세계는 언제나 설렘과 함께 약간의 두려움이 수반되지 않는가. 한 번도 자취해본 적 없는 독거 무지렁이의 제주살이가 막 시작되는 참이다. 오전 8시 2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겨우 시간 맞춰 타고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저는 제주로 갑니다, 장난감처럼 작아지는 서울의 수많은 건물들을 뒤로한 채!
선잠을 자다 보니 곧 제주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이번에 머무는 약 보름 동안 서귀포시의 올레길을 다 돌아보는 것이 목표인데 이제 목표에 막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 다가왔다. 꼭 성공하겠다는 마음보다는 '놀멍, 쉬멍, 걸으멍'이라는 말과 어울리는 여행을 해보자는 다짐을 하며 짐가방을 짊어지고 올레길의 첫 코스 시작점인 시흥리로 출발했다. 시흥리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제주에서 버스를 타는 건 4년 전 혼자 훌쩍 떠나온 겨울의 제주 여행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보다 조금 더 친절해진 카카오 맵을 확인하며 131번 급행 버스에 올라탔다. 급행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달려 천수동에 내린 뒤 같은 자리에서 201번 버스를 타고 시흥리에서 내리는 것이 이번 여행의 첫 미션이 되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제주 시내에 만개한 벚꽃들을 구경했다. 또 시내에는 동백꽃도 심심치 않게 보여서 동화 속을 달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천수동에서 201번 버스를 5분 정도 기다린 뒤 탑승했다. 카카오 맵에 같은 201번인데도 뒤에 쓰여있는 행선지가 다른 것들이 많이 보여서 버스에 탑승하기 전에 기사님께 '이거 시흥리 가나요?'하고 물어보고 탔다. 201번 버스는 내가 마지막 뚜벅이 여행을 했을 때도 애용했던 버스인데, 그때는 무려 위미리에서 제주시까지 2시간가량 탄 적이 있다. 나는 201번을 제주에서 운영하는 동쪽 순환 버스로 부르고 있다. 해안을 끼고 달리면서 서귀포에서 제주까지 제주도 반 바퀴를 도는 버스, 겨울에 춥고 힘들 때 이 버스 안에서 몸을 녹이면서 보았던 성산이 아직도 생생하다.
천수동에서 1시간 30여분을 달렸다. 그 사이에 201번 버스는 제주시를 벗어나 조천도 들르고 함덕도 들르고 김녕, 구좌, 세화를 누볐다. 이 버스는 참 제주의 완행열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달리를 지나 드디어 내가 내려야 할 시흥리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나만 내린 조용한 버스 정류장.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길 위엔 나뿐이었다. 반겨주는 것은 현무암 돌담과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들뿐. 혼자 여기에 왔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질 않아서 조금 감상에 젖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12시가 넘어서 걷기 시작하는데 걸음도 느리고 가방도 무겁다. 성산일출봉 근처 숙소까지 10km 이상을 걸어야 하는 나에게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가방 정리를 빠르게 마친 뒤에 1코스 시작 지점에서 올레 패스포트에 도장을 찍고 힘차게 출발했다.
시흥리에서 출발하고 나서 오름이 나오기 전 까지는 시흥리 동네를 산책하는 느낌으로 걸었다. 서울과 달리 주택이 많아서 집의 지붕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고 돌담이나 돌담 너머에 피어있는 것들을 구경하는 맛도 있었다. 어떤 곳은 무가, 어떤 곳은 유채가, 또 어떤 곳은 청보리가 있었다. 무엇도 없는 밭도 있었다. 무엇도 없으니 넌 어떤 것도 될 수 있겠다고 조금 부러워했다. 묵직한 가방이 어깨를 짓누르는 어색한 느낌만 제외하면 정말 상쾌한 시작이었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데다가 살짝 구름이 껴서 걷기에 아주 좋았다.
가방이 꽤 무거워서 -아마 한 8kg- 종아리가 당겨온다. 설악산 등산할 때 보다 더 무거운 짐을 들고 걷고 있으니, 다리가 놀랄 만도 하다. 올레 리본과 올레길 정방향 경로를 알려주는 푸른 화살표를 찾으며 동네를 벗어날수록 길에 경사가 생긴다. 아마도 오름 근처로 가서 점차 오르막이 되는 모양이었다.
오르막을 조금 걸어 오르면 말미오름으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말미오름을 소개하는 간세 뒤로 펼쳐진 수많은 계단. 제발 계단만은 아니길 바랐지만 사실 오름에 계단이 없었음 좋겠단 소리는 내가 야채곱창을 끊는다는 소리랑 비슷한 재질이다. 맞다, 헛소리란 뜻이다. 결국 현실에 순응하고 길을 간다. 이럴 줄 알고 챙겨 온 등산 스틱의 도움을 제대로 받았다.
공복에 오름까지 오르려니 아주 죽을 맛이다. 생각보다 가파른 계단의 연속이라 중간중간 쉬는 시간이 필요했다. 계단길의 모퉁이에 의자가 하나씩 있었는데, 그때마다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에 성산 일출봉이 보였다. 오늘 내가 가야 할 곳이 보이니 왠지 더 열심히 걸어야 할 것만 같았다. 산에 오면 항상 인생이랑 비슷하다고 느끼는 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목표를 알면 힘이 난다. 하지만 목표를 모르면 어디까지 힘을 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오히려 힘이 빠진다. 사소한 것까지 비슷한 게 산과 인생인 것 같아서 나는 힘들어도 산에 오르는 걸 계속하는가 보다.
짧고 굵은 계단길을 모두 오르면 정상에 도착한다. 말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말미오름. 마치 말의 머리를 타고 등줄기로 내려오듯 오름의 능성을 걷는다. 걸으며 보는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장관이다. 날이 조금 더 맑았으면 좋았겠다 싶었지만 날씨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비가 오지 않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능선을 넘어가면 정말 인적이 드문 산길이 나온다. 오솔길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길이었다. 어릴 때 시골 뒷산이 온통 내 놀이터였던 시절, 큰 밭으로 가려면 뒷산의 좁은 길을 따라 걸어야 했는데 알오름으로 향하는 길이 딱 그 길이랑 비슷했다. 넓고 좁은 길들을 지나다 보면 어느 순간 탁 트인 목초지(?)를 마주하게 되는데, 이곳 한가운데에 알오름 간세가 있다. 탁 트인 넓은 초원에 아래로는 오름들이 병풍처럼 펼쳐져있다. 조금 앉아서 쉬고 싶었지만 갈길이 바빠서 쉴 수는 없었다. 다음에 누군가와 함께 꼭 다시 오고 싶은 곳이 처음 생긴 순간이었다.
비탈을 넘어가니 알오름 정상이었다. 말미오름보다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여러 색으로 알록달록 물든 제주의 땅을 바라보며 잠시 쉬었다. 앉아서 쉬면 못 일어날까 봐 서서 쉬었다. 이렇게 제주를 바라볼 때면 나도 저 밭 중 하나를 사서 농사짓고 싶단 생각이 종종 든다. 찻집 사장님보다 농사꾼이 더 체질일 것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
말미오름보다 알오름이 비교적 고도가 낮은 덕분에 하산길이 금세 끝났다. 산길을 조금 내려오면 바로 임도가 나와서 임도에서부터는 등산 스틱을 사용하지 않았다. 마스크 틈으로 숲에서 내뿜는 봄내음을 한껏 즐겼다. 한 20분 정도 걸었을까, 유채꽃으로 뒤덮인 밭을 발견했다. 사진 찍으라고 흰색 의자까지 두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야심 차게 챙겨 온 휴대용 삼각대를 펼쳐 제주의 봄에 한껏 취한 나를 동영상과 사진으로 열심히 담았다. 평소에는 사진 찍히는 것보단 찍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만 혼자 올 땐 혼자서 나를 잘 찍는 편이다. 함께 올 때는 내가 원치 않아도 누군가가 나를 담아주지만 혼자 왔을 땐 내가 나를 찍지 않으면 그 순간의 나는 영영 담아낼 수 없으니까. 혼자가 된 순간에는 더더욱 내가 나를 잘 돌봐야 한다.
유채꽃 밭을 지나 조금만 더 걸으면 큰길이 나온다. 이제부터는 아스팔트 길로 걸을 수 있다. 종달1교차로를 건너 또 다른 마을로 들어선다. 수국이 유명한 종달리에 왔다.
종달리의 한 카페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나와 또다시 걷는다. 이제는 휠체어도 다닐 수 있는 길이라서 조금은 넓은 길이 나온다. 비록 자전거 도로를 걸어야 하는 것이지만 산길이나 일반 도로를 그냥 걷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종달리 마을을 벗어나면 바로 해안 도로를 따라 쪽 길이 이어지는데 성산일출봉과 우도를 보면서 걸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중간에 오징어를 말리는 모습도 봤는데, 친구들을 널어놓은 것 같아 썩 반가웠다.
내내 보이지 않던 사람들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물가에 숨어 새를 촬영하시던 분, 여자 외국인 두 분, 또 올레길을 걷거나 해안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시는 분들까지. 사람이 보인다는 게 이렇게 안도감이 드는 일인지 몰랐다. 오름이나 조금 으슥한 길을 걸으면서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것 같다.
한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보면서 무심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까 오른 말미오름이 보였다. 올레길이 둘러둘러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렇게 많이 돌아온 줄은 몰랐던 터라 약간 힘이 빠졌다. 그렇지만 올레길은 제주를 구석구석 보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조금 돌아오면서 관광지가 아닌 로컬 제주를 마주할 수 있어서 좋았던 걸로 생각을 바꿨다.
그렇게 혼자 노래도 부르고 영상도 찍으며 오길 3시간, 드디어 중간 스탬프 지점인 목화휴게소에 도착했다!!
목화휴게소에는 바다를 보며 맥주에 오징어를 드시는 분들이 아주 많았다. 솔직히 내가 술만 잘 마셨으면 바로 착석이었을 텐데 아쉽게도 나는 술을 너무 못 마셔서 그럴 수 없었다.. 목화휴게소 리뷰도 좋고 별점도 높아서 정말 분위기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놀랐다. 뭔가 노상에서 맥주 마시는 느낌, 먹는 건 만선 호프인데 뷰가 제주도라니 말 다했다. 다음에 술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오는 걸로 하고 목화 휴게소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었다.
목화휴게소를 지나고 나서부터 무릎이 조금씩 아파왔다. 발도 부었는지 새끼발가락 부근이 점점 쓰라렸다. 정말 열심히 걷는다고 걸었는데도 이상하게 성산포항이 나타나질 알았다. 가방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 같고 걸음은 점점 느려진다. 포기하고 버스 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쉽게도 버스가 지나다니는 길이 아니었다.
그런데 길 중간중간에 킥보드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래도 타지는 않았다. 걷겠다고 내려온 첫날부터 킥보드라니, 자존심에 스크래치다. 조금만 걸으면 끝난다고 위로하며 다시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두 번째 고민이 머지않아 찾아왔다.
두 번째 고민은 기존 올레길대로 성산항을 둘러서 숙소로 갈 것인지, 아니면 올레길을 따라가지 않고 바로 숙소로 갈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사실 체력으로 보면 바로 숙소로 가는 게 맞는데 또 올레길을 이렇게 결정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포기가 안됐다. 성산 갑문을 지나가면서 계속 고민한 끝에 가다가 힘들면 어디든 주저앉아 쉬는 걸로 하고 성산항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금씩 천천히라도 계속 걸으니까 성산항이 금방 나타났다. 성산항이 보이기 시작하고 나서 긴장이 풀렸는지 힘듦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바닥에 앉아 쉴까 하던 찰나에 의자가 나타나 준 덕분에 앉아서 쉬었다. 10분에서 15분 정도 충분히 쉬면서 숙소로 갈 체력을 충전했다. 역시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결과도 안 나오지만 조금씩이라도 하면 결과가 달라지는 걸 여기서 느꼈다. 결국 나는 원래의 올레길 그대로 성산항으로 돌아서 가는 걸 해냈다!
성산항에서 숙소로 가는 길은 이상한 언덕길이었다. 막판에 또다시 오르막길을 만나서 슬펐지만 이 언덕만 넘으면 숙소가 있다는 생각에 없던 힘도 절로 솟았다. 언덕 초입엔 몰랐는데 언덕을 다 오르고 나니 성산일출봉이 엄청 크게 보였다. 이제 정말 끝이 보이는 것이다.
커진 일출봉만큼 신나는 마음도 커졌다. 비록 어깨는 짓눌려 사라질 것 같았지만 곧 쉴 수 있다는 생각 하나로 버텼다. 이 각도에서 보는 일출봉은 처음인지라 낯설었지만 반대쪽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약간의 안개와 어두운 현무암, 푸릇한 잔디가 합쳐져서 공룡이 살았던 중생대에 와있는 기분이 들었다. 길을 따라 걷다가 버스가 달리는 게 보여서 이제 정말 시내로 들어섰다는 걸 실감했다. 버스 정류장을 보니 괜히 반가웠다. 혼자 있는 게 좋긴 해도 역시 사람 체취는 있어야 그리울 것도 생기나 보다.
버스를 보고 1분도 되지 않아 내가 이틀간 머물 숙소를 찾았다. 체크인 후에 방에 들어가서 오늘 내내 어깨를 짓누르던 가방부터 벗어던졌다. 가방을 벗을 때 느껴지는 해방감이란!! 오늘 하루 목표로 했던 길을 모두 걸었다는 뿌듯함과 동시에 몸이 가벼워진 행복감까지 모두 누렸다. 2일 차부터는 배낭을 들고 다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2코스를 걸을 땐 짐은 가볍게, 사진은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