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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ul 14. 2018

문제를 쓴다, 생각한다, 답을 쓴다

유쾌한 천재 물리학자의 이야기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




리처드 파인만(Richard P. Feynman, 1918~1988)은 아인슈타인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로 꼽힌다. 누군가 나처럼 과학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투표권을 주고, 둘 중의 한 명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1초의 망설임 없이 파인만에게 한 표를 행사할 것이다. 왜냐고? 재밌으니까. 파인만이 얼마나 엉뚱하고 재미있는 물리학자인지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너무 많아 대표적인 일화만 소개해도 이 지면으로는 턱없이 모자랄 정도다. 


그는 196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노벨상 받는 것도 그렇지만 유명해지는 것도 귀찮았다. 파인만은 기자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노벨상 안 받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 기자도 진지하게 답했다. “노벨상 안 받으면 더 유명해질걸요?” 받으면 유명해지고 안 받으면 더 유명해지는 상황. 결국, 파인만은 기자의 조언을 받아들여 노벨상 수상을 선택한다. 


걱정은 현실로 나타났다. 노벨상을 받자 받기 전보다 훨씬 유명해졌다. 강연회만 열면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렸다. 파인만은 그게 싫었다. 자기 이름을 감추고 다른 사람 이름을 내걸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사람들이 매번 속을 리 없었다. 오히려 더 큰 강당을 빌리지 않은 학생들이 준비 소홀로, 그때마다 파인만이 나서 이들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귀찮아서 이름을 감췄는데 더 귀찮게 된 것이다. 


파인만이 얼마나 엉뚱하고 재미있는 물리학자인지 보여주는 사례는 너무 많다.


◇ 종교·과학·예술이 뒤섞인 지적 향연


1918년에 태어난 파인만은 MIT를 졸업하고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문 분야는 양자 전기역학(Quantum electrodynamics). 양자역학을 기반으로 전자와 전자기장의 성질이나 상호작용을 규명하면서 이론물리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해왔다. 파인만은 이른바 재규격화 이론(Renormalization theory)으로 양자 전기역학을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도모나가 신이치로, 슈윙거와 공동으로 1965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가 직접 고안한 파인만 다이어그램(Feynman diagram)은 이론물리학에서 널리 이용되고 재규격화 이론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냥 이론물리학에서 대단한 업적을 남겨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는 정도만 기억하자. 양자역학, 양자 전기역학, 재규격화 이론 등을 이해하기는 역부족인 데다 설명할 능력도 없다. 


파인만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원자폭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도 있다. 다른 과학자들과 달리 그는 이 프로젝트의 참여를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인만이 자신이 원자폭탄 개발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뉘우쳤다고 해도 그의 성격과 행동을 고려하면 정색하고 사과했을 것 같지는 않다.


파인만은 또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폭발 원인을 밝히는 데 기여했다. 챌린저호 폭발은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우주개발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꼽힌다. 1986년 1월, 7명의 승무원을 태운 우주왕복선 챌린저호는 발사 73초 만에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조사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한 파인만은 사고 원인이 오링(O-ring)이라는 작은 부품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고무 재질의 오링이 추운 날씨 때문에 탄력을 잃어버린 결과, 고온·고압의 가스가 오링 사이로 누출되어 불이 붙으면서 외부 연료 탱크가 폭발한 것이다. 그는 조사 보고서에서 “NASA(미 항공우주국)가 우주선 승무원과 러시안룰렛을 벌인다”라고 비판했다.  


파인만은 칠판 앞에 서서 들어오는 사람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강의실 탁자를 두드렸다.


◇ 종교·과학·예술이 뒤섞인 지적 향연


책에는 어려운 물리학 이론이나 수학 공식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학교에서의 크고 작은 경험, 연구 과정에서 겪은 일, 동료 연구자들과 만나고 회의했던 장면 등 소소한 이야기만 펼쳐진다. 저자가 리처드 파인만 본인으로 되어 있으니 지식의 방대함과 깊이를 자랑하기 위해서라도 몇 차례 언급할 만한데 그런 내용을 찾긴 어렵다. 그 흔한 지적 허세나 운명으로 가장한 본인 선택의 위대함도 강조하지 않는다. 이상한 자서전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털어놓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파인만이 남다른 천재였음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그는 이미 초등학생 때 온 동네 라디오를 고쳐 ‘생각으로 라디오를 고치는 아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열두 살 때 방문을 열면 울리는 도난 경보기를 만들었다. 젖은 손에 벤젠을 적셔 불을 붙이는 과학적 마술을 보여주기도 했다. 


MIT 재학 시절 ‘무의식’을 주제로 한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매일 밤 자기 꿈을 관찰했다고 한다. 설탕통에 개미가 꼬이지 않게 하려고 매일 창틀에 모인 개미의 습성을 연구했다. 이런 과학적 재능과 달리 인문학은 싫어했던 모양이다. 헉슬리의 <한 조각의 분필에 대하여>를 읽고 감상문을 써야 하는데 <한 점의 먼지에 대하여>라는 패러디를 제출하기도 했다. 과학자와 군사 전문가들이 한 데 모여 있는 데서 남의 금고를 열어젖히고, 죽음이 예고된 여성과 결혼하는 순애보를 남겼다. 밴드에서 드럼을 치며 삶을 즐겼다. 


강의할 때 파인만은 칠판 앞에 서서 들어오는 사람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탁자에 손을 얹고 박자를 두드렸다. 지각한 학생이 앉을 때까지 도박사가 포커 칩을 가지고 놀 듯 분필을 돌리기도 했다. 책의 추천사를 쓴 제트추진연구소의 앨버트 힙스 박사는 강의실에서 만난 파인만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학생이던 시절에 들었던 그의 강의가 기억난다. 그는 학생들을 기다리며 마치 비밀스러운 농담을 할 때처럼 빙긋이 웃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물리학에 대해서, 그림과 방정식에 관해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과 눈의 광채가 전달하는 것은 비밀스러운 농담이 아니라 물리학, 그 자체의 즐거움이었다. 이 즐거움에는 전염성이 있었다. 우리는 이 전염병에 걸리는 행운을 누렸다.”  


이 책은 파인만의 자서전인 동시에 공부하고 연구하는 자세에 관한 일종의 보고서다.


◇ 종교·과학·예술이 뒤섞인 지적 향연


파인만을 과학자로, 위대한 물리학자로 만든 것은 지적 호기심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는 그의 태도였다. 권위를 싫어했다. 이런 그에게 기존 지식과 이론은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이었고, 권태로운 권위였을 것이다. 이런 무거움과 권위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유머나 농담이라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독자적인 학문 체계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 책은 파인만의 자서전인 동시에 공부하고 연구하는 자세에 관한 일종의 보고서다. 


책의 저자는 파인만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대필한 책이다. 책 표지에는 빠져 있지만, 지은이는 파인만이고 엮은이는 랠프 레이턴이다. 동료였던 로버트 레이턴의 아들 랠프 레이턴이 파인만과 어울리면서 들은 이야기를 정리했다. 파인만이 원고를 검토하고 가필하고 출판을 승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다만 과학과 사회적 책임의 관계에 관해 깊게 고민하지 않았던 건 실망스럽다. 앞서 말했듯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하지 않았다. 파인만은 자신의 이런 성향에 영향을 준 대표적인 인물로 함께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폰 노이만을 꼽았다. “그는 나에게 흥미로운 사상을 제공했다. 그것은 내가 몸담은 세계 대해 나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폰 노이만의 충고로 아주 강한 사회적 무책임감을 가졌다. 이런 자세를 가지니 전보다 훨씬 행복했다.” 


‘파인만 알고리즘’이라는 용어가 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최강의  알고리즘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문제를 쓴다, 매우 깊게 생각한다, 답을 쓴다.’ 파인만의 천재성을 부각하기 위해 누군가 만든 용어이거나 파인만식 유머일 것이다. 그래도 올해는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파인만처럼 한번 해보자. 문제를 쓴다, 매우 깊게 생각한다. 답을 쓴다.  


강의실의 리처드 파인만. 


by 책방아저씨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8371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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