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 전 유물을 통해 깨닫는 좋은 Product의 기본원칙
“저는 대학교에서 고고학(Archaeology, 考古學)을 전공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소개하면 항상 이런 질문이 뒤따라 나오더군요.
"고고학이 뭐죠?"
"뭐 배우는거에요?"
순수 고고학과는 전국에 3개밖에 없으니,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고고학은 과거의 제품을 통해 그 시대를 이해하려는 학문입니다.
과거의 "기록"을 연구하는 사학과 다르게, 고고학은 과거의 "제품(=유물, 유구)"을 연구합니다.
조금 어렵게 표현하면, What을 통해 How를 추론하고 Why를 상상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물질자료(What)가 무엇이고,
어떻게 생산~사용~폐기되었는지 분석(How)하여,
그 물질자료가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 상상하고 논증하는(Why) 학문인 것이죠.
참고) 사학 vs 고고학
서기 3023년의 역사 연구자이고 2022년 출시된 아이폰에 대해 연구할 때,
- 사학자 : (제품소개서를 보며) 아이폰 14 프로와 프로맥스에는 다이내믹 아일랜드가 생겼구나!
- 고고학자 : (제품을 보며) 2022년형 아이폰 중 외부 프레임이 스테인리스인 기종은 베젤과 노치가 분리되어 알약과 같은 형태로 바뀌었구나!
최근 가장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 유현준 교수님의 셜록현준 채널 영상에서 종종 언급되는, 루이스 설리번이라는 건축가가 한 말입니다.
프로덕트 메이커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 출처 : 셜록현준 유튜브 (링크)
최근 친한 지인에게 국립중앙박물관 고대사관의 프라이빗 도슨트(관람 해설)를 하게 되었는데요. 선의로 하는 일이긴 하지만, 전공자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다시 전공서적과 논문, 보고서 등을 읽으며 준비했습니다.
모든 유물은 1,500년 전에 인간이 사용하던 “제품”이었단 점을 고려하면, 과거의 유물들도 어떠한 기능(Function)을 만족하기 위해 그러한 모양(Form)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IT씬에서 일하는 지인분을 위해 IT 프로덕트와 관련한 부연설명과 스토리텔링을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핀테크 프로덕트에 대해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한다면, 복잡한 이야기보단 사용해 본 앱(토스와 카카오페이, 기존 금융사 프로덕트 등)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게 가장 쉬운 것처럼요.
때문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다양한 국가와 시대에 발굴되면서, 지역과 시기 간에 유의한 차이를 보이는 유물을 중심으로 디자인과 기능의 연관성을 설명하고자 계획하였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유물 중 하나가 바로 환두대도(環頭大刀, 고리자루 큰 칼)였죠.
- 출처 : 소환두대도 - e뮤지엄 대가야박물관 (링크)
환두대도는 검 손잡이 끝에 환두(=고리)가 달린 칼을 말합니다. 노끈을 걸고, 노끈을 손으로 묶어 전투 시 칼을 떨어뜨리지 않고 사용하기 위한 용도로 환두가 있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 출처 : KBS역사스페셜 (링크)
칼의 본질이 전투에서 상대방을 베기 위함임을 생각하면, 환두라는 형태(Form)는 전투 중 위험상황에 덜 노출되게 하기 위한 기능적 요소(Function)입니다. 위 사진과 같은 환두대도는, Forms follows function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봐도 될 정도죠.
하지만 이는 환두대도 중 원형의 고리만 있는 “소(素) 환두대도”라는 형식에만 딱 맞는 이야기입니다.
고리가 아무 장식이 없는 원으로만 되어있는 소환두대도와 다르게, 고리 안에 장식이 있는 환두대도가 있습니다.
삼루(三累), 삼엽문(三葉文), 용봉문(龍鳳文) 환두대도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소환두대도보다 적은 수로 출토되며, 소재가 화려하고, 문양이 복잡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 좌 : 삼루환두대도 - 국립경주박물관 (직접촬영)
- 중 : 삼엽문환두대도 - 국립경주박물관 (직접촬영)
- 우 : 용봉문(단룡문)환두대도 - 국립공주박물관 (링크)
이 칼의 환두에 노끈을 걸어 전투에서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노끈이 중간의 문양을 건드리게 되어 부러지거나, 반대로 노끈이 장식에 걸려 끊어질 수도 있을 겁니다.
환두(Form)가 필요한 이유였던, 전투 중 칼을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한 기능(Function)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죠. 칼의 본질적 기능을 생각하면 아주 형편없는 모양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환두대도에 문양을 넣은 건 대체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 What : 문양이 있는 환두대도
- How : 숫자가 적다(소환두대도보다 희귀하다). 지역 별로 모양이 다르다. 소재가 다르다(황동, 금 등)
- Why : 아마도 각 지역이나 단체의 우두머리급(왕, 장군 등)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사용했을 것*
* 환두대도의 출토 양상과 더불어 함께 출토되는 다른 유물들(공반유물)을 비교/분석한 결과이며, 학자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문양이 있는 환두대도가 해결하고픈 문제(Problem)는 소환두대도와는 달랐을 겁니다.
학부생 시절 저는 이런 문양 있는 환두대도가 “권위를 과시하고 싶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제품이라 생각했습니다.
“문양 있는 환두대도를 가진 나는, 전투를 하는 너희들과 다르다.”
“문양도 없는 칼이나 차는 적군의 장군/우두머리보다 내가 더 뛰어나다.”
희귀한 자원으로,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제작하는 것이니, 지금의 명품과 비슷한 역할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전투에서 칼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문양이 있는 환두대도가 필요한 이유는 아니었을 겁니다.
“다른 이들에게 명령의 말빨(?)이 서게 만들고 싶다” 는 문제(Problem) 를 해결하고 싶었다는 게 더 합리적인 추론이겠죠. 문양 있는 환두대도가 우두머리급 무덤에서 소량만 발굴된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고요.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인 점을 고려하면, 실제 전투보다는 장례식에서 정권(혹은 피장자, 묻히는 사람)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문양 있는 환두대도는 “권위 있어 보이고 싶다”는 문제(Problem)를 해결하기 위해, 환두에 화려한 소재와 장식, 문양을 새긴 제품(Product)으로 만들어졌다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소환두대도와 형태는 비슷할지 몰라도, 제작 의도는 전혀 달랐던 것이죠.
1명만 만족시켜도 먹고살 수 있는 환상적인 Product Market fit
실물로 존재하는 제품이 아닌, 디스플레이 내부에만 존재하는 IT 제품도 환두대도처럼 비슷한 모양이지만, 다른 문제를 풀기 위해 제작된 것들이 많죠.
Form follows function 관점에서 본질적인 기능에 충실하지 못한 제품과 디자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편리한 것, 심플한 것, 빠른 것 등 IT 프로덕트가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는 장점을 기준으로 다른 IT 프로덕트를 바라본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프로덕트는 오히려 더 불편하고, 더 복잡하고, 더 느릴수록 고객이 느끼는 효용성이 증가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 프로덕트 중에서는 눔(Noom)의 일부러 보여주는 로딩화면이나, 천편일률적인 콘텐츠 큐레이션 서비스 사이에서 롱블랙이 보여준 화려한 디자인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연한 기회였지만, 보이는 형태(Form)나 기능(Function) 보다는 제품을 통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지"가 더 중요한 것 임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반성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네요.
고고학이라는 도메인을 공부할 때도 PM으로서 직업병은 어쩔 수 없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런 사고와 관점이야 말로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IT 도메인에서 공대생이 가지지 못하는 생각의 관점을 가진 것이라 위로하기도 했고요.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각자의 인문학적 관점으로 더 깊은 사고를 통해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해 더 멋지고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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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혹시 제가 진행하는 국립중앙박물관 도슨트 투어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로 들어와 주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