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러닝타임 내내 온 몸을 비틀면서 본 영화다. 일종의 중년 남자 공포영화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영포티를 3개월 앞둔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괴롭게 본 작품이다. 이걸 보면서, 뭐랄까, 나도 완전 아저씨가 되었구나, 이 아저씨의 불안을 후벼파는 작품 앞에서 약간 항복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에는 결국 이것이 우리 시대 누구도 피해가기 어려운 바로 그 '인간의 무용성'으로 귀결된다는 점이, 확실히 더 섬뜩하게 다가온 면이 있었다.
(지금부터 스포일러) 영화는 시종일관 유머를 유지하는 것 같지만, 한 시대를 지탱해온 장인들, 또 한 명의 어른이 되고자 평생 애써왔던 노동하는 사람, 흔히 사회가 부여한 '이상'을 롤모델처럼 삼고 평생 추구해온 가장의 몰락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라고 말하는 그 시점부터 시작되는 몰락은, 사실 우리 시대 모든 안정된, 즐거운, 행복한 기분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 폭로하는 듯하다. 작중 내내 다리를 덜덜 떠는 만수(이병현)의 불안이 나한테까지도 전염되는 것 같았다.
불확실성의 시대, 사람들은 언제 자신이 '나락'갈지, 내 자산은 언제 휴지조각이 될지, 가만히 있다가는 언제 벼락거지가 될지 두려워한다. 이 작품에서는 그 두려움은 '실직'으로 표상되어 있다. 정규직 보장이라는 시대정신 아래, 실직의 두려움은 마치 과거의 유물이 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미국식 자본의 영향, AI의 발전 등으로 실직은 끝나지 않는 공포로 여전히 다가온다. 이 시대에 근본적인 안정이란 없다.
<헤어질 결심>에서만 하더라도, 돈 문제 같은 건 거의 다뤄지지 않은, 그야말로 '불안한 사랑'의 종말을 다루었던 반면, <어쩔 수가 없다>에서는 '굳건한 사랑'이 '돈 문제'와 결합하면 어떻게 괴물이 되는지를 이야기한다. 사랑을 끝내 포기 하지 않은 자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하는 배우자,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에는 타인들을 죽이더라도 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본디 사랑하도록 태어났건만, 사랑은 인간을 인간성으로부터 가장 멀리 데려갈 수도 있다.
영화를 보면서는, 이 절망적인 실직 상황을 그래도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자기계발처럼(마치 <폭싹 속았수다>처럼), 사업이라도 일으켜서 성공하고 극복하길 바랐건만 영화는 더 잔인한 현실을 드러낸다. <폭싹 속았수다> 같은 작품은 사랑이 충치를 치료하며 나아가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어쩔 수가 없다>는 결국 자본주의 아래 인간은 그 마지막 인간적 가능성으로서의 충치마저 뽑아버림으로써 괴물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는 자기 경쟁자들을 다 죽여버리고, 실제로 다시 가장의 지위를, 중산층 중년 남자의 자리를,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는 아빠의 자리를 회복한다.
수십년 간의 전문성이 AI의 발전으로 하루 아침에 쓸모 없어진 현실은 마치 우리 시대의 여러 흩어진 장면들을 헤드라이트로 비추는 듯하다. 사람들은 실직하고, 남은 한 자리를 놓고 서로를 죽이며 싸운다. 과거 노동운동이나 러다이트 운동처럼 이에 대한 집단적 행동도 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간신히 자기 앞가름이나 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다보니, 주변에서 회사 다니며 자격증 준비를 하는 또래 아빠들이 생각났다. 나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매일 쌓아갈 것들을 고민한다. 우리가 쌓아온 것들은 다 휴지조각이 될 상황일지도 모르므로. 이게 이 영화가 공포영화인 이유다. 미래는 마치 너무 밝아서 보이지 않는 면접관 뒤 태양과 같다. 이 대목에서 얼마 전에 본 박이소 작가의 <당신의 밝은 미래>가 생각났다. 작가는 흰 벽을 밝히는 조명에 '당신의 밝은 미래'라는 이름을 붙인 작품을 전시했다. 미래가 너무 밝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나무를 가꾸던 사람은 결국 나무를 죽이는 인간이 된다. 마지막에 시체를 파먹고 자란 나무에는 벌레가 들끓지만, 그는 더 이상 그에 관심이 없다. 대안은 뭘까. 다들 제2의, 제3의 인생을 꿈꾸면서 자격증 하나 더 따고, 다른 미래를 준비하는 걸까. 아니면 재테크를 열심히 해서 월배당을 받으며 '문제 없이' 경제적 수준을 유지하는 걸까. 개인적 차원에서는 그런 일들이라도 해야할 것이다. 아니면 사람을 죽이러 떠날 수밖에 없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 사회가 무엇을 해야하고, 이 사회가 개인에게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만 들릴 뿐이다. 이 위태로운 시대,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작품 내적으로 재밌는 요소들이 많았다. 몇 번 강조되는 흰 빛, 체호프의 총을 오마주한 듯한 구성, 충치를 뽑아냄으로써 완성되는 인간성을 첼로 연주가 완성하는 결말 등 장면마다 상징들을 음미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했다. 여러 생각하기 좋은 영화였다.
* 사진은 #어쩔수가없다 메인 예고편 캡쳐화면 및 박이소 작가의 <당신의 밝은 미래>(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 전시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