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비행기에서 내려 일본의 한 마을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다. 소녀에게 처음 일본의 땅에서 홀로 살게 된 삶은 낯설고도 새로웠다. 해야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마냥 행복하거나 설렌다는 기분 같은 것을 느낄 처지는 아니었지만, 어딘지 마음의 한 부분이 살짝 움직이는 듯했다. 그녀는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 시키는대로, 집을 구하고, 한 골목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이하 스포일러) 그녀의 이름이 '레제'다. 그녀는 한 군사조직에 의해 탄약고에서 부모도 없이 키워졌기 때문에, 임무수행 외에 삶의 다른 면은 누린 적이 없었다. 학교를 다닌 적도 없었고, 조직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등 임무 수행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존재였다. 이번에 주어진 임무는 일본에 사는 한 소년을 죽이는 일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날, 그녀는 멀리서 자신이 쫓던 소년이 전화부스에 들어가는 걸 보았다. 그리고 그를 따라 부스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 순간 그를 살해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소년을 본 순간 아주 잠깐 망설이게 된다. 예전에 키우던 강아지와 진짜 닮아서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1분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고, 일본에서의 생활이 끝난다는 게 아주 조금은 아쉬워서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 망설임이 지나고, 소년의 경계라도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소년에게 예전에 키우던 강아지가 너와 닮았다며, 웃다가, 운다.
그 순간 소년이 갑자기 속이 안 좋다면서 토하는 시늉을 한다. 소녀는 소년을 보면서, 어쩌면 그가 '토할 때'까지만 기다려주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잠깐의 망설임이 이후 모든 걸 바꾸어놓는다. 소년은 입에서 거베라 한 송이를 꺼내어 마술이라며 울고 있는 그녀에게 건넨다. 소녀는 처음으로 받아본 꽃 한 송이에, 자기도 모르는 마음의 균열이 생긴다. 계획을 바꾸어, 소년을 유혹해서, 천천히 죽이겠다고 마음 먹는다.
그 이후의 여정에서 소녀가 정확히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소년이 매일 그녀가 일하는 카페에 찾아오는 일이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사조직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나쁠 게 없다는 건 자명했을 것이다. 그녀는 '훈련받은대로' 연기하며 소년을 착실히 유혹하지만, 우리 삶의 모든 '연기'가 그렇듯, 연기하다보면 거기엔 진심이 섞이기도 한다. 매일 아침 해가 뜨면 자신을 찾아오는 소년, 그를 유혹하는 시간, 평온하게 흘러가는 오후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좋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소년을 완전히 유혹하기 위하여, 하룻밤, 아무도 없는 늦은 밤의 학교에 몰래 둘이서 들어가보자고 한다. 학교를 다녀본 적 없는 소년을 데리고 학교에 가서 놀면 '근사한 데이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소녀도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런 '늦은 밤의 학교 방문'은 그녀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평범한 소년소녀처럼, 한번쯤은,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학교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미 그런 걸 원하게 되었다는 것부터, 그녀의 마음은 단순 '실험용 쥐(모르모트)' 같은 존재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는 걸 뜻한다. 그녀의 마음에는 전례없는 균열이 생겨있었다.
그녀는 종종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멍하니 바라본다. 자신에게도 자유가 허락될 수 있을까, 자신도 저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사람처럼 도망칠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연기였고, 위에서 시키는대로, 소년을 죽이기 위해 하는 일이었지만, 그녀의 모호한 마음은 그런 일을 극도로 비효율적으로 만들면서, 자기합리화를 낳고 있었다. 그녀는 해야할 일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면서, 삶에서 처음으로 자기의 시간을 살고 있었다. 그녀는 반쯤 거짓말로, 반쯤 연기로, 반쯤 진심으로, 소년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한다. 마치 소년이 대신 그 마음을 결정해주길 바라면서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소년이 거절하는 순간, 그녀는 모든 모호했던 마음을 접고 다시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로 돌아간다.
이후 내용은 소녀가 소년을 죽이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것으로 채워진다. 이 때 그녀는 그야말로 미쳐버린 사이코패스처럼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사실 '살인기계'로 길들여지고 만들어졌던 그녀에게 이는 어려운 일도, 망설일 만한 일도 아니다. 어쩌면 그녀 안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인간적인 마음'을, 한 소년이 건들여주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타인을 아무렇지 않게 죽여버리게 된 순간부터, 인간은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결국 마지막에 이 소녀는, 소년에게 모든 건 거짓이었고 연기였다고 말하고는 떠나지만, 본국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지 못하고 승강장에 멈춰선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그녀는 이전의 그 '실험용 쥐'로, 인간성을 내버린 인간병기로,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비인간적 무기로 영원히 돌아가 그대로 살게 될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발걸음을 돌린다. 대신 그녀는 인간으로 죽기를 택한다. 이전의 그 '비인간'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인간으로 살 수도 없다는 걸 깨닫고, 인간으로 죽기를 바란다. 그래서 소년에게 돌아간다.
소년과 보냈던 며칠 남짓의 시간, 카페에서의 아침, 어느 오후면 맞이하곤 했던 햇빛, 멍하니 바라보던 하늘, 소녀에게도 유일했던 학교에서의 밤, 그 모든 것들을 두고 그녀는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소년이 기다리고 있는 카페로 간다. 그것이 마지막인 줄 알면서도, 그 시간을 택하기로 한다. 그녀는 처음으로 매일 걷던 길을 달린다.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고, 이룰 수도 없는 꿈인 것을 알기에, 그 꿈을 꾸기로 한다. 그것이 그녀가 그나마 삶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꿈꿀 수 있는 순간이라는 걸 알기에, 꿈 속에서 삶을 끝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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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니, 남는 여운이 있다. 그건 아무래도 내용의 공백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레제'의 진심이 무엇인지, 레제의 입장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 공백을 채우려는 작업을 뇌가 계속하게 된다. 그래서 나름대로 레제의 입장이라는 걸 따라써보았다. 이런 글쓰기를 해보는 건 꽤 오랜만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15살 무렵, 처음 글을 썼던 동기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사진 - #체인소맨레제편 예고편 캡쳐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