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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키 Feb 26. 2020

포르투갈에서 아침을(7)_첫 혼술 그리고 lv.999

6-7시에 일어나서, 세상이 너무 어두워서 조마조마했던 마음들이 뭉그러졌는지 제법 늦잠도 자고 해가 뜨고 나서 기지개를 펴기도 한다.


한국이었으면 이렇게 늦잠 자는 나를 스스로 타박하고 알람을 몇 개 더 추가했겠지만 그냥 모든 알람을 껐다. 그럴 이유도 자격도 있다. 


어차피 하루를 꽉 채워해야 할 무언가가 없다. 무리해가며 새벽에 짬 내어 운동하고 회사에 갈 필요도 없다. 눈 뜨는 대로 하루를 시작하면 된다. 


유후

내 평생 아침밥은 굶어본 적이 없어서, 여기와 서도 아침은 정말 잘 챙겨 먹는다. 내 사전에 아점 이런 거 없음... 아침. 점심. 저녁!!! 삼시 세 끼. (현대인들이 3끼를 다 챙겨 먹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도, 흑)


오늘도 따뜻한 음식을 먹고 싶어서, 슈퍼에서 사 온 퀘이커 오트밀을 뜯어봅니다. 따뜻한 오트밀 죽인데, 달콤한 시나몬 가루 위에 팍팍 뿌린 그런 맛. 좀 달긴 하지만, 그래도 오트밀 죽 워낙 좋아해서 맛있게 먹었다. 역시 따뜻한 음식 좋아.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아침, 저녁으론 13 ~ 18도. 구글 날씨만 보고, 두꺼운 재킷을 꺼내 입고 나간다.

오늘도 포르투갈에서 아침을.


1차 행선지는 이제는 익숙해진 카페 브릭

놓칠 수 없는 아침 커피.


그리고 다이어리 꺼내서 이야기 끄적끄적.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한 참을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사람이 점점 많아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어젯밤에 걸어 다니면서 좋다고 감탄했던 거리가 낮에는 어떨지 궁금해서 그곳을 걸어보려고 한다.




아, 오늘은 드디어 포르투갈 음식을 먹었다!! 나도 드디어 문어요리. 그렇게 부드럽고 맛있다는 포르투갈 문어, 기대 기대.


가게 이름은 Taberna Anti Dantas


살짝 짭조름하지만 부드럽고 맛있게 잘 삶어진 문어에 아래는 달콤한 통고구마 & 사워 소스 그리고 이름 모를 초록색 야채가 깔려있다. 결론적으로 엄청 맛있었다. 가격은 16유로로 비쌌지만, 첫 도전치고 굉장히 만족. 괜찮은 식사를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서버가 너무 친절했다. 음식도 다 설명해주고 추천도 해주고 어울리는 와인도 추천해줬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고주망태 복선...)


해산물이랑 화이트 와인을 왜 먹는지 알겠다. 비릿한 느낌도 잡아주고 음식이랑 정말 잘 어울렸다. 이 와인이 진짜 가볍고 프루티 하게 딱 잘 어울려서, 이름 물어보니까 사진 찍어가라고 이렇게 구도도 잡아주셨다.


팔자에 없는 낮술이 시작되었다. 음식 나오기 전에 이미 반잔은 마셨고.

낮이 되니 날이 더워져서, 이미 몸이 뜨거운 상태였는데 취기가 훅 올라온다. 기분이 좋아지는 중 헤롱헤롱...@_@

구조도 인테리어도 굉장히 특이하고, 분위기가 좋다. 낮보다 밤에 한 번 더 오고 싶은.



맛있게 식사하고, 배도 너무 부르고 해서 어젯밤에 갔던 전망대로 간다.


리스본에선 뭐다?

1일 1 전망대


풀 냄새 좋은 공원이 있길래 앉아간다. 여기서 술기운도 좀 해독(?)하고 벤치에 앉아서 다이어리를 한참 썼다. 오늘 이상하게 하고 싶은 말이 많나 보다.


여행은 '이방인' 되고 싶어서 오는 것 같다. 나를 아는 사람도 하나도 없고, 많은 것이 새로운 기분. 그 어떤 시선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 어떤 생각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태로 부유할 수 있는 것. 여행에 오면 오히려 현재에 충실하게 된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사실 떠나면 별게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진 않다. 다만 내가 '이방인'이 된 사실이 좋다.



나그네 길에 오르면 자기 영혼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지내고 있는지, 자신의 속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행이 단순한 취미일 수만은 없다.

자기 정리의 엄숙한 도정이요,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그러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연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소유 발췌]






목적지 없이 걸으면서 주변의 편집샵이랑 콘셉트 스토어를 구경 다녔다. (예쁜 선글라스가 많아서 이것저것 써보는데, 진짜.... 너무너무 예쁜데, 너무 안 어울려서 슬펐다. tmi )


빈티지샵도 많지만,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한남동 돌아다니는 것처럼 포르투갈 의류 & 안경 브랜드 등을 발견할 수 있다. 디자인도 예쁘고 매장 디스플레이도 감각적인 곳들이 꽤 있었다

낮에 마신 와인으로 시뻘게진 얼굴로 돌아다녔다.


그리고 찾아간 yoyo object라는 가구 샵

여기서 눈 호강을 제대로 했다지. 어제 슈레기 같은 것이 많은 빈티지샵에서 흐릿해진 시야 또렷하게 바꿔갑니다... 또륵. 너무너무너무 감각적인 조명이랑 가구들이 많았다.

안에 들어가려면 벨을 눌러야지 문을 열어준다.

프라이빗한 느낌, 뭔가 더 특별한 느낌!





날씨가 정말 환상이다. 걸어만 다녀도 좋은. 아니 걸어 다녀야 더 좋은 것 같은 이 도시.

여기서도 또 버스킹. 리스본은 버스킹의 도시구나. 비긴 어게인을 왜 리스본에서 했는지 알겠다.



갤러리 투어. allarts gallery

페루 여성 작가라고 했는데, 새와 물고기 그리고 여성이 등장하는 그림들이었다. 뭘 상징하는지 한참을 보고, 상상해보고.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허락받고 사진을 찍어왔다.





리스본에는 오래된 서적을 판매하는 북스토어도 꽤 많다. 무슨 책인지, 어떤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북커버부터 정말 오래된 책들이라서 보는 것만으로도 재밌었다.





그리고 흐르고 흘러, 걷고 걸어  다시 오게 된 코메르시우 광장.

다시 오니 이렇게 좋을 수 없다. 왜냐면 엄청 좋은 버스킹을 하고 있었거든.



리스본에서 제일 여유롭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곳을 있는 그대로 즐긴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시원하게 바다 바람이 불고

강물이 반짝반짝 빛나고

듣기 좋은 버스킹 음악이 울려 퍼지고

모두들 햇살 아래 여유롭게 누워있고 앉아있고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나도 모든 긴장과 걱정을 벗어던지고 걸터앉아서 버스킹을 한참을 들었다. 햇살이 너무 따뜻해서 드러누워서 낮잠도 잤다. 그래도 소매치기는 걱정되니까, 가방을 베개로 베고 누웠다. 똑똑해.







한 참을 있다가, 바람이 점점 추워져서 몸을 좀 녹이고 싶어서 야외 카페로 와서 따뜻한 커피와 나타를 시켰다.

(나타=에그타르트) 나타는 차갑고 맛없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여행에 많은 책을 가져왔지만, 오늘의 선택은 무소유. 나는 밖에서 자연광 아래에서 책 읽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 행복했다. 





오늘은 이왕 낮부터 달린 거, 밤에도 달려볼까 한다. (달린다는 말이 가소롭지만)  오늘 밤에는 파두 공연이 있는 작은 바를 예약을 해뒀다. 8시에 오픈을 하는데, 시계를 보니 아직 7시다. 밤이 되니 또 너무너무 추워서, 정말 오들오들 떨 정도로 춥다.. 근처에 호스트가 추천해준 다른 칵테일바에 왔다. 먼저 가볍게 와인을 한 잔 마셔야겠다. 


오, 생각보다 분위기 엄청 괜찮았다.

가게 이름은 Pensao Amor

갑자기 다른 시대로 들어온 느낌을 받았다. 스피키이지 바처럼. 숨어 있는 이색적인 공간이랄까. 

혼자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지만, 이제 슬슬 익숙해지면서 혼술 만렙을 찍으려고 한다. 


그래도 식당이 아니라 이런 제대로 된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셔본 건 처음. 첫 혼술 경험! 뭔가 왜 짜릿하지?


그래도 이런 혼자만의 시간은 약간 어색하긴 하다. 배터리 아껴야 해서 핸드폰 하기도 그렇고, 혼잣말할 수도 없고, 벽보고 멍 때리기도 좀 그렇고, 할 수 없이 방황하는 시선을 고정시키기 위해 이 어두운 데에서 책을 꺼냈다.


음, 안 읽히는 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그래도 마시다 보니 또 알딸딸해져서, 주위 신경 하나도 안 쓰고 혼자 즐겁게 시간 보내다가 나왔다.

혼자 셀카를 찍고 있으니까, 서버가 사진 찍어준다고 했는데 그건 진짜 너무 민망할 것 같아서 강력하게 거부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난 알쓰라는 것을. 여긴 글라스 와인을 무슨 물 따르듯이 가득 따라줘서, 한 잔만 먹어도 계속 취한다.




후! 8시가 다되어서 예약한 곳에 왔다. 재즈바인 줄 알았는데, 파두 공연을 하는 곳이었다.

DUQUE DA RUA


굉장히 작고 따뜻한 가족적인 분위기의 술집이었다. 분위기 정말 좋았다, 다 같이 공연을 즐기는 느낌!

중간중간 휴식 시간을 갖고 싱어들이 돌아가면서 앞에 나와서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약간 참여형 뮤지컬 같다고 해야 하나...? 여기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 & 서버도 같이 노래 부른다. 앞에서 노래 부르고 뒤에서 노래 부르고 옆에서 노래 부르고. 나도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전통적인 포르투갈 파두 공연은 아니고, 가볍고 밝은 그런 파두 공연이었다.

나중에 호스트에게 물어보니, 호스트가 추천해준 파두 공연장이 진짜 전통이라고. 자기 포르투갈 토박이라서 그 정서를 안다고, 거기에 가 보라고 하더이다. 뭐 그래도 나는 새롭고 좋았으니.


그리고 한국 블로그에서 보고 가서 그런지 한국 분도 만날 수 있었다. 호우, 한국말 드디어! 정말 반가웠고, 둘 다 봇물 터진 듯이 막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공연을 즐기고 12시가 다 되어서 집으로 갔다.






밤 12시가 다되어서 집으로 가고 있는데 배가 너무 고팠다..... 술만 계속 마셨지 뭐 제대로 먹은 게 없는 것이다. 

역시 패스트푸드 최고. 케밥집이 열려있길래 냉큼 팔뚝만 한 케밥을 샀다. 하하.



그리고 그 늦은 밤중에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호스트 살로메를 만났다.

둘 다 길에서 너무 놀라서


-살로메: 오잉???? 너 어디가?????

-나: 약간 취했어.. 하하하하


이 낯선 땅에서, 이 야심한 밤에 길거리에서 나를 알아 봐주고 안부를 물어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갑자기 뭉클했다. (미친 감성) 알고 보니 그녀는 비즈니스 파티 같은 게 있어서 거길 가는 중이었다. 피곤해 죽겠는데, 너무 가기 싫다고... 아이는 친정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라고 한다. 정말 슈퍼 워킹맘. 그리고 처음 보는, 잊을 수 없는 그녀의 레드립 후후.


오늘은 아주 아주 아주 꿀잠 예약이다. 꿈에서도 파두 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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