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영화 아직 못 찍은 감독 지망생의 한탄.
브런치에 처음 쓰는 이 글의 제목은 약 3년간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한 질문이다. 미국에서 영화과를 졸업하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 졸업 작품을 찍으면서 미국 동문과 이야기를 나눌 때 늘 나를 괴롭힌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10년간의 유학 생활을 하면서 내가 얻어온 것이 무엇일까 다들 궁금해할 텐데... 정작 내가 쥔 것은 하나도 없는 듯했다. 물론 외국 생활을 했다는 그 자체의 메리트가 정말 감사했지만, 하필 영화에 빠졌다는 것이 부모님께 말하기
두려웠다... 엄격한 아빠는 내가 그래픽 디자인과에서 영화과로 전과를 한 지도 모르고 계셨다. 엄마도 나의 꿈을 응원해 주기는 했지만 내가 과연 영화계에서 정신이 온전한 채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하며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셨다. 나는 한국에 가면 당장에 취업을 해야겠다고 느꼈다.
졸업 직후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입사한 곳이 부산국제영화제이다. 물론 단기 스태프였지만 영화 비슷한 일을 한다는 것이 좋았다. 이 국제적인 영화인들의 잔치 뒤에 서서 나는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다. 늘 뉴스에서만 보던 배우, 감독들의 일정을 잡아주고, 그들의 시시콜콜한 부탁들이 적힌 메일을 보며 내가 어느 정도 영화계의 일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함께 일하는 스테프들은 영화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에 더욱더 힘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화려했던 개막식에서 현타가 엄청나게 오더라. 레드카펫을 걸어 들어온 그들에게 지정된 좌석을 안내하고 무대 뒤 그늘에 서서 그 광경을 보자 하니 나는 도태된 사람 같다 느껴지더라 물론 영화제에서 일하는 인력들은 모두가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존재들이지만 나처럼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웬만한 자존감을 가지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든 현장이더라. 4개월간의 근무가 끝나고 나는 두 달간 가만히 집에 누워 우울하게 보냈던 것 같다. 사실 그 시간이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다녀온, 용하다는 사주 집에서 "나는 빛을 받고 사람들 앞에 서야 하는 사주"라고 했다. 그 말인즉슨,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무대에 서거나, 또는 빛에 관련된 직업을 하면 좋다는 것이다. 조명을 다루는 일도 물론 포함이다. 나는 그 말을 용기로 삼아 지금까지 버텨내고 있다. 모호한 그 사주에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춰 자위를 하고 살아간다. 마음이 힘들 때는 습관처럼 8년도 더 된 그 사주 집 선생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두 달간 시체처럼 누워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한 생각은 영화를 찍으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도 않는 직장에 들어갔다. 쥐꼬리만 한 월급 중 매달 50만 원의 적금을 들었다. 적금 통장의 이름은 '사랑하는 영화를 위해서'로 지어주었다. 팔백만 원 정도를 모으면 짧은 단편영화 하나쯤은 찍겠다 싶었지만 역시나 더럽게 안 모이더라. 더군다나 스텝들의 식비나 로케이션 렌탈비, 그리고 장비 렌탈비를 다 생각해 본다면 팔백만 원은 적은 돈이다.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천만 원으로 찍어도 모자라는 게 단편영화의 현실이니까. 솔직히 말해서 오십만 원으로도 영화는 찍을 수 있지만 내가 좋은 건 알아서 그런 저예산으로는 내 작품에 만족을 못할 것을 나는 안다. 어쨌든 지금도 차곡차곡 적금은 쌓이고 있으니 뿌듯하긴 하다.
당장에 돈이 없으니 단편영화 제작 지원을 노렸다. 시나리오를 써서 골치 아픈 서류들과 함께 공모전에 지원해 운이 좋으면 그 많은 지원작 중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돈을 지원받는다.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원받은 돈을 쓰는 절차가 너무 까다로워서 다시는 제작지원을 받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솔깃한 제안이다. 열심히 써서 낸 단편영화 제작 지원을 떨어지고 나서 나는 대략 이 주 동안은 술만 마셨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도 책은 계속 읽었다. 또 같잖은 자존심은 또 있어서 술에 취한 와중에도 계속해서 핸드폰 메모장에 글감을 모았다. 내 시나리오가 재미없고 신선하지 않아서 안 뽑힌 건데 괜히 당선자들 이름을 보며 욕을 했다. 비겁하고 옹졸한 나란 인간.
기분을 풀어보겠다고 간 단편영화 상영회에서는 한 여배우가 다큐멘터리 비슷하게 만든 극영화를 상영했다. 주인공이 자신이고, 조연은 다 제 동료 배우들을 써서 제작비를 거의 안 들이고 영화를 찍었더라. 그럴듯했고 좋은 영화였기에 기분이 비참했다. 얼굴도 이뻐서 화면에 잘 나오는 그 여배우는 꽤 센스 있게 영화를 만들었더라. 축하하는 마음과 동시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정말 간절했다면 뭐라도 하나쯤은 찍었을 텐데 아직 내 열정이나 용기가 부족하나 싶었다.
더군다나 내 아버지는 내가 영화를 꿈꾸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셨다. "나중에 시집도 못 간다. 안정적인 일을 찾아라."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럼 나는 의문을 가진다. '안정적인 것이 무엇일까?'. 회사에 들어가 차근차근 승진하며 월급을 모으는 것? 결국엔 집을 사고, 차를 사며 나름 재산을 불리는 것? 내 책장에 가득 들어찬 시나리오 작법 책이나 제작 책, 다른 감독들의 각본 집을 보며 아버지는 혀를 찼다. 좋아하는 일을 찾은 게 얼마나 큰 축복인데... 응원 한 번이 뭐 그리 어렵다고. 아버지 마음이 이해가 갔지만 나는 아직 마음이 어려서 가족의 응원 섞인 한마디가 그렇게 그립더라.
요즘 내 기분을 그나마 좋게 만들어주는 것은 흥행하는 영화를 보며 아쉬운 점을 콕 집어내 비판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치 내가 뭐라도 된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찌질한 건 알지만, 재미는 있더라. 지금은 아무도 나를 감독이라 부르지 않고, 또 나 자신도 나를 감독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중에 50대가 되어서 내 자식이 내게 물어본다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래도 내 인생의 일부분을 조금은 무모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도전을 위해 바쳤다. 그리고 내 자식들도 그런 도전을 해 보길 진심으로 바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보며 조금 우습기도 하다. 마치 스물다섯에 세상을 다 살아 본 것처럼 한탄하니 말이다. 하지만 주변 지인들은 제 살길을 차근차근 살아가고 있으니 무리도 아니긴 하다. 나는 그래도 모호한 지금의 내 인생이 마음에 든다. 꿈을 찾아갈 거라고 왕왕 짖어대는 똥강아지 같은 그 용기가 가상하다.
꼭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이런 고민은 누구나 다 한다. 그렇기에 나는 외롭지 않다. 세상을 버티고 있는 청춘들에게, 잠시 길을 잃은 내 또래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그래도 괜찮아~, 넌 너를 제일 잘 알잖아. 네가 포기한다면 그걸 좋아할 사람은 너를 미워하고 비난하던 사람들이야.”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 현실과 타협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억울한 타협을 하더라도, 당신 마음속 그 어떤 작은 열정이라도 소중하게 붙들고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기회는 마음과 태도가 준비된 사람에게만 오니까.
일주일에 밥 한 끼는 꼭 정성스럽게 나 자신을 위해 차려 먹길 바란다. 한 번씩은 거울을 보며 육성으로 ‘잘하고 있어’라고 이야기하길 바란다. 나는 나를 응원해줄 것이다. 나를 응원해 주는 것은 현실도, 가족도, 모인 돈도 아닌 나 자신뿐이니까. 그러니 당신들도 당신 자신을 꼭 응원해주고, 달래주고, 위로해주길 바란다. 버티는 것이 아니라 파도 속을 유영하며 세상의 흐름 속에 유연하게 섞여 들어 상처입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