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혜화동 골목에 위치한 아뻬(APE)
기적이 일어났다. 나에겐 햇수로 5년 사귄 남자친구, 하릴없이 카페에 앉아 있는 걸 제일 싫어하는 남자친구가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난 주 나에게 "가고 싶은 카페가 어딘지 찾아봐, 주말에 거기 가자."라고 먼저 제안을 한 것이 아닌가.
왠지 내가 저번에 쓴 브런치 글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취미 생활을 함께 해보기로 마음 먹은 거니...?)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 지 모르니 재빨리 카페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사실 내 휴대폰 앨범 속에는 이미 가고 싶었던 카페들이 쌓여 있었지만 첫 걸음부터 남자친구의 진을 빼놓으면 안되니 지하철로 30분 이내에 이동할 수 있는 곳으로 골라주기로 했다. (내가 봐줬다)
그렇게 선택된 곳이 바로 혜화동에 위치한 아뻬 서울(APE Seoul), 서울에서 도시 양봉을 하는 사람들이 차린 카페라고 해서 기대를 잔뜩 하고 길을 나섰다.
우리 여기 오기로 한 게 잘 한걸까?
사실 카페를 찾아가는 도중에 '돌아갈까?'라는 고민을 살짝 했다. 카페는 한성대입구역과 혜화역 중앙 쯤에 위치해 있었는데, 성균관대 사거리를 지나 로타리까지 가서 골목길을 또 올라가야 했다. 차를 탄다면 몰라도 뚜벅이라면 최소 15분은 걸어야할 거리.
(중간에 잠시 길을 잘못 들은 시간까지 합쳐) 30분 정도 걸었을까? 조용한 혜화동 골목길 사이로 아뻬 서울이 보였다. 외관은 합격점!
외관이 카페의 첫 인상인 만큼 난 대게 여기서부터 호불호가 갈리는데, 모던한 인테리어와 투박한 로고 사이로 보이는 작은 텃밭과 묘목들에 왠지 모르게 포근한 느낌을 받았다.
내부는 생각보다 좁았다. 주말이라 더 북적였던 점, 테이블 수가 많지 않은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테이블 간격이 좀 좁아서 답답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왠지 내 말소리가 옆사람에게도 잘 들리지 않을까 싶은 느낌... (사람이 많아 테이블 쪽은 찍지 않았습니다.)
잠깐동안 고민하다 바깥 테라스 자리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평소 북적임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라면 내부를, 나처럼 조용한 공간이 필요한 사람은 테라스를 선택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런 선택권이 있다는 점은 분명 플러스 요소)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 고르는 시간
어서와, 꿀 편집숍은 처음이지?
은 잠시. 메뉴를 고르기 위해 간 카운터에서 엄한 것들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카운터 한 켠에는 실제로 판매되고 있는 다양한 꿀 관련 상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그리고 카페 한 켠에는 아예 본격적으로 꿀 상품들을 진열해놓고 있었는데, 직접 기른 벌들에게서 채취한 꿀부터 꿀로 만든 와인, 밀랍 양초, 립밤 등 종류가 꽤 다양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여기가 카페인가 꿀 편집숍인가)
새로운 디저트의 세계
그리고 막간 인터뷰
구경을 하다보니 어느새 당이 떨어졌다. 잠깐이나마 까먹었던 메뉴를 시켜야 할 때-
색깔이 다른 두 메뉴판이 있는데, 흰색 메뉴판은 일반 커피나 음료가 적혀있고 오렌지색은 이곳만의 시그니처 메뉴들로 구성돼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또 시그니처 메뉴를 먹어줘야지!
일단 음료 선택은 쉬웠다. 서울 허니 카페라떼와 디.오.씨- 천연벌집꿀 아포가토도 먹고 싶었지만 너무 빨리 해치울 것 같아 포기했다.
하지만 난관은 디저트 메뉴. 평소 같으면 "치즈 케이크 주세요!"라고 했을텐데, 이곳 메뉴는 좀 생소한 것들이었다.
'까눌레? 까눌레까지는 알 것 같은데 러시아식 벌꿀 케이크는 뭐지?'
큰일이다. 내 결정장애가 도지기 전에 얼른 사장님께 뭐라도 물어봐야 했다.
"ㅅ...사장님...ㅇ...이건 뭔가요?"
<medovik>. 뭔가 굉장히 특별하다는듯 케이크 보관함에 들어있는 이 케이크가 궁금했다.
"아! 이건 러시아에서 먹는 케이크입니다. 층층마다 생크림이 들어가있고 꿀을 곁들여 먹는 케이크죠"
이것 저것 궁금하다는 내 눈빛을 읽으셨는지, 사장님께서 카페의 가치관과 함께 다른 메뉴도 꼼꼼히 설명해 주셨다. 본의 아니게 인터뷰를 따냈달까-
#아뻬사장님_인터뷰
"방금 그건 medovik이라는 허니 케이크로, 러시아에서는 대중적으로 즐겨 먹는 케이크이고요. 이건 아실지도 모르는데, 카눌레(canneles)라는 프랑스 디저트로, 겉에는 저희가 직접 양봉한 꿀로 밀랍을 한 거예요. 그 옆에 까눌레 아이스크림 샌드는 까눌레와 아이스크림, 각종 견과류를 곁들여 먹는 디저트인데 아주 맛있어요! 제가 알기로는 국내에서 이 디저트를 파는 곳은 저희가 처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그러면 이건 러시아 디저트고 이건 프랑스 디저트네요? 그렇다면 어떤 한 나라의 디저트를 전문으로 제공하는 게 아니라 꿀을 메인으로 한 디저트들로 구성하신건가요?"
"그렇죠. 저희가 서울에서 도시 양봉을 하는 곳이다 보니 디저트도 꿀이 메인으로 들어간 것들로 제공하고 있어요. 저기 보시는 상품들도 다 저희가 직접 만드는 것들이고요."
"신기하네요! 이것도 저것도 다 먹어보고 싶은데 (제 배와, 제 지갑엔 한계가 있어) 다음에 와서 먹어봐야 겠네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사장님의 친절한 설명으로 결정 장애 극뽁! #서울허니카페라떼 #디.오.씨 #medovik #카눌레를 시켰다.
(그리고 이건 보틀로 파는 콜드 브루 커피)
처음 느껴본 조용한 서울 라이프
그리고 달달한 디저트
여기가 우리가 앉았던 자리.
바로 옆에는 이런 감성적인 공간도 있다. (감성적인 공간=인스타 사진 잘 나올 것 같은 곳)
서울 카페에서 이렇게 여러 명이 한 테이블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종종 봤는데, 남자친구와 나는 프라이빗한 공간을 좋아하므로 패스. 이미 한 커플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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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가 받은 첫 메뉴
가장 기대됐던 #medovik이 나왔다.
비주얼 100점 만점에 200점. 층층이 쌓인 생크림과 화룡점정으로 올라간 무화가 한 조각(그 시기의 계절 과일이 올라간다고 한다. 내가 갔을 땐 무화과)
그리고 메인 포인트는 바로 무화과를 지나 케익 아래까지 흐르는 달달한 꿀(무슨 19금 소설같네...)
대부분 디저트들은 포크를 댄 순간부터 비주얼이 참혹해지기 시작하는데, 이 케이크는 어째 망가뜨리면 망가뜨릴수록 식욕을 돋구는 매력이 있었다. (저 엄청난 생크림을 좀 보길...)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맛! 처음 입에 넣었을 땐 달달함에 황홀했고 두 세번도 역시나 씁쓸한 콜드 브루와 곁들여 먹기 좋았다. 그러나 꽤 단맛이 강해 계속 먹다보면 어느새 물리기 시작한다. 결국 다 먹지 못하고 약간 남겼다는 슬픈 이야기...
*하지만 참고해야 할 건, 나와 내 남자친구는 단 음식을 그렇게 즐겨 먹는 사람들이 아니다. 파르페와 마카롱 같은 극강의 단맛은 찾아 먹지도 않는다. 그러니 우리에겐 단맛이 강했어도 평소 단 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만족스러운 디저트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료와 함께 #까눌레가 나왔다. 이 조그만 아이가 2,500원- 몸값이 굉장히 비싼 아이다. (뒤에 APE 명함은 사장님께서 주신 것)
밀랍으로 코팅해서인지 겉이 딱딱한 편. 마치 밤을 까먹듯, 주리를 틀듯 포크 수개로 열심히 갈라냈다.
속은 더 밤 같은 비주얼. 맛은... 글쎄다.
조금만 달아도 만족하는 우린데, 이 아이는 좀 밍밍한 단 맛이었다. 맛이 덜한 밤 같다고 해야하나? 남자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마디로 덜 익은 붕어빵
아까 사장님께서 추천해주셨던 #까눌레아이스크림샌드라면 이것 보다는 맛있을지도 모른다며 혼자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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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특히 남자친구가 극찬한 #서울허니카페라떼
일단 비주얼 자체가 독특했다. 칵테일 잔에 설탕이나 계피가루를 바르는 건 봤어도 라떼 잔에 꿀과 아몬드를 바르는 건 또 처음이다.
비주얼도 비주얼이지만, 맛은 더 맛있었다. 자세한 레시피는 모르지만 설탕이나 시럽이 아닌 직접 양봉한 꿀로 라떼 맛을 더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커피와 우유의 비율도 참 좋았고 아몬드의 고소한 맛과 씹는 재미가 한 번에 어우러져 저절로 '진짜 맛있다!!!'라는 말이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이건 내가 마신 #디.오.씨
메뉴 소개서에서 <진한 콜드 브루 커피에 하우스 메이드 오렌지 시럽, 크리미한 우유 거품, 얼음 5알> 이라고 아주 자세하게 적혀있었는데,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맛있었다.
일단, '이게 지금 최상급 크림생맥주인가' 싶을 정도로 우유 거품이 엄청나게 짱짱하고 크리미했다. 너무 짱짱해서 입에 우유 거품을 잔뜩 묻히고 나서야 콜드 브루가 입으로 전해질 정도! (남자친구는 당장 거품을 닦으라고 했다. 티슈가 없다니까 친절히 공수해왔을 정도. 아마 시크릿가든을 생각한 거겠지...?)
쓰고 진한 커피 사이로 미세하게 달달한 오렌지 시럽이 느껴져서 묵직하게 상큼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이건 개인적으로 비추.
디저트에 비해 라떼를 너무 빨리 마셨다며 남자친구가 시킨 #아이스티인데, 정말 사심 다 빼고도 너무x100 달다. 단 맛에 혀가 아릴 정도. (계속 마시던 남자친구는 이대로면 미각을 잃을 것 같다고 했다...)
얼음을 저렇게 쌓아준 건 천천히 물과 녹여서 먹으라는 뜻인걸까? 어떻게 생각해도 이 음료는 너무 달았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의 아뻬 라이프(APE Life)를 즐긴 우리.
한 조각에 2,500원인 까눌레와 아이스티는 아쉬웠지만 시그니처 카페라떼와 디오씨, medovik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추천해주고 싶은 메뉴였다.
그리고 혜화동의 조용한 골목길, 우리 둘만의 독립적인 야외 테이블.
서울에선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조용한 행복'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곳이었다.
왠지... 사장님이 그리신 듯한 귀여운 벌꿀 그림.
(사진 촬영은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찍었습니다)
아뻬 서울(APE Seoul)
주소: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35나길 1
영업: 11:00~22:00|매주 화요일 휴무
사이트: https://apeseoul.kr
인스타그램: @ape_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