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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 Jul 05. 2024

안희연 <단어의 집>

  종종 시인들이란 고약한 심보를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특정 시인의 고약한 품행을 직접 목격했다거나 작품에서 그런 태도를 유추할 수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시인이 시를 써 독자들을 감화시키는 방식 자체가 조금은 고약하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시는 아름다움을 언어로 드러내는 장르이고, (혹은 언어 자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도 하고) 그 아름다움은 명료하기 보단 아득하고 분명하기보단 아득하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시의 아름다움은 형태 있는 것들의 자태와는 달리 축축하고 어두울 때가 있다. 내용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자꾸만 헤아리며, 기어코 의미를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지만 결국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는걸 뒤늦게 깨닫곤 한다.


  독자들이 언어의 정원에서 헤매고 있을 때 시인들은 설계자의 마음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시를 읽으며 독자들이 마주하는 당혹감 같은 건 애초에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듯, 허둥거리며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즐기고 있는 건 아닌건지. 심지어 독자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의미의 출구라는게 만들어 놓지 않은 건 아닐런지.


  시를 읽는 독자에게 시인은 책장 너머에 있는 존재이기에 애를 써도 닿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눈에 가까운 듯 손을 뻗어도 항상 한두 뼘 위에 가있을 수 있다. 글을 쓰는자와 읽는자의 필연척 시차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권능자에 위치하게 된다. 권능자의 맞은편에 선 독자는 경외와 경탄을 읊조리며 자신의 왜소함을 확인할 수 밖에 없는데, 이런 불평등한 관계 때문에 시인이 고약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심통을 부리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심드렁한 생각은 시인이 쓴 에세이를 읽다보면 조금은 누그러지곤 한다. 에세이가 시라는 미로의 단서를 던져주는 것 같아서다. 시인이 쓰는 이야기는, 그게 자신의 시에 대한 내용이 아니더라도, '내가 만들어논 출구는 이렇게 생겼고, 당신이 눈 앞의 그 벽은 무엇을 닮게 그렸으며, 저기 작은 골목은 돌아가더라도 더 오래 머물러주길 바라'라고 자신의 속마음을 얘기해주는 것만 같다. 시인의 에세이는 의미의 최단 경로가 아닌 가장 멀고 깊고 아득한 길을 그려놓은 지도인 셈이다.


  시가 아닌 언어로 시인의 고백을 읽어내려가 보면 결국 그들고 헤매고 있는 자구나, 우리가 당신이라는 걸로 시에 닿는다면, 그보다 먼저 아름다움 앞에서 길을 잃은 자들이구나,위에서 내려다보며  허우적거리는 우리를 보며 비웃는 존재가 아니구나, 라고 새삼 생각하게 된다. 페이지 너머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게 아닌, 내가 읽는 곳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면 마음이 누그러워지고 시가 좀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시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에 균열이 가진 않는다.


  아이를 재우고 짬짬히 안희연 시인의 <단어의 집>을 읽었다. 친절하고 다정하고 사려깊은 글이었다. 문장 문장마다 시인의 품성이 느껴졌다. 섬세한 인간이 아직 안희연 시인의 시집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어떤 마음으로 시의 공간을 조경하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시인의 시에서 마주할 풍경과 감각이 그려진다. 언어 위에 군림하며 헤매는 날 노려보는 게 아니라 함께 길을 헤아려줄 것만 같다.


  생각해보니 시인이 고약한 존재라고 단정한 건 잘못인 것 같다. 그저 내가 그렇게 느껴쓸 뿐이고, 실상 시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했다는 뜻이니까. 시의 문장 사이를 거닐며 눈 앞에 없는 시인의 표정을 자꾸만 떠올리며 살피고 싶은 마음이었다. 당신의 언어에 닿았는지 혹은 아직 닿지 못했는지 확인 받고 싶지만 답이 없기에 심통이 났던 것이다. 사실 이건 감동의 다른 표현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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