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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 Jul 27. 2024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패할수록 분명해지는..

스포 있음

이 영화는 마지막 6분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거짓이 아니다. 미장센과 대사, 일어나는 사건 모두 마지막 장면으로 가기 위한 통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종착점인 줄 알았던 엔딩은 새로운 미로의 시작이었다. 아니 오히려 미로보다 더 어지럽다. 미로가 양갈래길에서 선택해야 하는 고뇌가 정도를 준다면 이 영화의 엔딩은 어느 곳에도 길이 없는 듯한 황망함이 눈앞에 펼쳐진다.


자연과 인간, 개발과 보존이라는 이분항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영화의 구조상 영화의 엔딩 직전까지는 이야기하는 바가 분명해 보인다. 자연을 해치려는 인간의 이기심과 안일한 욕망에 염려하고 분노하는 자연의 반응이 맹렬하게 대립한다. 도쿄의 연예기획사 사장이 내뱉는 무심한 말은 자연을 이용대상으로 하는 이의 전형이고, 마을 촌장이 설명회에서 설파하는 말은 자연의 이치를 대변한다. 짧은 시간 동안 양측의 증언이 충분히 제시되기에 배심원이 된 관객은  어쩔 수 없이 자연에 손을 들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게 영화가 의도한 빌드업일 테니까.


하지만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 길을 잃게 만든다. 타쿠미가 타카하시의 목을 조르는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가 다카하시의 목을 졸라야 하는 이유는 없다. 이유가 해명되지 않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혼돈이다. 질서 이전의 혼돈. 상류의 일을 하류가 감당해야 하듯 어떤 원한과 이유로 목을 졸라야만 하지만 영화에는 이유는 없다. 관객은 인간의 상식으로 이유를 해석해야 한다.


인간의 상식이란 건 예술 매체를 해석할 때 사용되는 상징체계이기도 하고, 영화의 외적 정보이기도 하고, 영화가 지시할 사회상이기도 하다.


상징체계로 해석하자면 타쿠미는 자연의 대리인이고, 자연을 해치러 온 인간을 징벌한 것이다. 쓰러진 어린아이 하나와 총에 빗맞은 사슴 모두 자연의 상징물이다. 그럼 좀 해석이 된다. 타쿠미가 자연의 정령이 되어 복수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 코로나라는 단어가 분명히 등장하고, 구체적인 현실인 캠핑 보조금 역시 중요한 소재로 나온다. 이러한 현실의 반영이라고도 읽을 수 있을 법하다. 전염병 앞에서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인간을 보며 기술과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오만했던 인류에 대한 반성일 수도 있다.


영화 초반, 타쿠미가 학교 안으로 들어갈 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며 멈춰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모습이 꽤나 기괴하다. 스냅사진처럼 아이들이 멈춰 선 채로 먼저 등장하다가 잠시 후 다시 움직인다. 지난 코로나 시대의 3년을 은유하는 것 같다. 인간은 잠시간 멈춰있었고, 다시 움직였다. 기나긴 인류사에 3년은 술래가 고개를 다시 돌리는 순간 정도로 짧을 뿐이다. 물의 오염을 후쿠시마 오염수로 읽으면 더더욱 영화는 명료해진다. 인간이 떠난 후쿠시마에 야생 사슴이 거니는 모습은 뉴스에서 많이 다뤄졌었다.


이제 각자의 해석을 선택할 때이다. 이 영화는 논쟁을 설명하기보단 논쟁을 유도한 뒤 사라진다. 깃털로 새의 존재를 지시하는 것처럼, 영화 속에 꿩이 나오는가? 꿩의 깃털만 분명히 나올 뿐 꿩은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꿩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는 영화의 해석에 달려있다. 영화의 이미지 너머를 보는 건 관객의 몫이다.


다시 엔딩으로 돌아가보자. 각자의 해석법을 들고 들어가더라도 여전히 영화 속 장면을 분명히 설명하지 못한다. 설명에 가까울 순 있지만 설명에 닿지는 못한다. 마치 앞에 달리는 동물의 거리를 반씩만 줄일 수 있는 토끼처럼, 가까워질 순 있어도 영원히 따라잡을 순 없다. 설명하려 할수록 설명되지 않음을 절감한다.


얼마 전 자연이란 단어에 관한 글을 본 적이 있다. nature란 단어가 처음 일본에 들어왔을 때 메이지 지식인이 고안한 대응어가 자연이었는데 사실 언어를 엄밀이 따지면 틀린 번역이었다는 것이다. 자연은 ‘스스로 말미암은’ 이란 뜻인데 nature란 단어의 어원을 따지면 ’ 신이 만들어 준 ‘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번역이란 틀에서 보자면 ‘타연’이 더 정확하다. 그렇다면 자연은 틀린 말인가? 번역이 실패했을 뿐 의미에 실패한 건 아니다. 서양이 자연을 신의 창조물로 봤고 동양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본 것일 뿐이다.


두 가지 자연의 길로 경유해 영화를 건너보자. 자연은 신의 질서라 봤을 때. 생각할 건 신의 질서는 인간의 합리적 질서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사필귀정, 천벌 같은 원리는 자연의 섭리 중 인간이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의 원리일 뿐, 인간이 납득할 수 없는 신의 뜻이 더 많다. 성경에 끝없이 등장하는 말이 ‘왜 이런 시련을 주냐’는 질문 아닌가. 타쿠미는 신과 인간의 사이에 있는 자이고 인간의 몸으로 신을 대리하는 무당이 된다. 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간의 목을 조를 때, 인간은 인간성 안에서 이유를 찾지만 실패한다. 전염병이 그렇고 지진이 그렇고 갑작스런 교통사고가 그렇다. ‘도대체 왜’ 다카하시의 질문은 성경 속 신에 대한 외침과 닮았다.


스스로 말미암은 자연이라면 어떤가. 그건 더욱 공포스럽다. 인간이 차마 이해하지 못하는 신의 질서조차 없다. 은유나 상징조차 무의미한 현상일 뿐이다. 의미를 부여하려는 애쓰는 인간에게 해석할 수 없는 난수표를 들이민다. 그건 차라리 확률에 가깝다. 그렇다면 다카하시의 외마디는 무색해진다. 질문이 아니라 비명에 가깝다. 비명은 총을 맞은 사슴이 내뱉는 울음소리와 다를 게 없어진다.


해석할 수 없는 혼돈, 그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해석할 수 있는 감독의 의도 아닐까. 초중반까지 영화가 분명하고 친절한 게 그 이유이다. 그럼 영화의 해석을 포기해야 하나? 다카하시처럼 체념하듯 탄성만 내뱉으면 되는가? 그건 아닌 것 같다. 애초에 답이 없는 문제에 가득 채운 오답이 이 영화의 아름다움의 본질이리라. 의도된 실패에 화려하게 빨려들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본질에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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