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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리 Feb 28. 2021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기획 히스토리 1

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 하세요 30

우연히 박막례 할머니의 〈치과 갈 때 메이크업〉을 본 것이 시작이었다.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너무 재밌어서.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거 봤냐고 들이대면서 보고 또 보고. 그러다 말았다. 유튜브를 그렇게 열심히 보는 사람은 아니어서. 재밌는 할머니가 있구나 하고 지나갔다. 잊고 지내던 즈음, <코스모폴리탄> 인터뷰가 화제가 되었다. 청춘들의 고민 상담이 주제였는데, 박막례 할머니의 촌철살인 답변에 묻어나는 인생 내공이 장난이 아니었다. 자려고 누웠다가 이거다 싶어 황급히 일어났다. 2017년 12월 23일 밤 12시가 가까워 오던 시간이었다. 손녀인 김유라 피디에게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보냈다. 연말 연휴가 지나고 보자, 는 긍정적인 답변이 왔다.


박막례 할머니와의 인연 시작. 이때는 정말 너무 매력적인 할머니다! 재밌다! 밖에 없었다


다음 날 출근해서 기획안을 썼다. 아직 만나본 적 없는 저자들로부터 어떤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지 상상해보는 시간은 막연하고도 재미있다. 처음 기획 아이디어로는 크게 세 가지를 생각했다. 첫 번째, 잡지의 인터뷰 방향처럼 ‘할머니의 고민 상담소’로 요즘 세대의 고민들에 대한 할머니의 조언을 받고 싶었다. 박막례 할머니의 긍정적인 기운과 유머가 담긴 명언들이 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번째는 할머니와 손녀의 세계여행기. 맨 처음 유튜브 채널을 만들게 된 호주 여행부터 출발해 10여 곳을 다녀온 추억이 쌓여 있었다. 기존에 엄마와 딸, 엄마와 아들의 여행기들이 출간되어 좋은 반응을 얻은 적도 있으니, 할머니와 손녀의 여행 에세이라고 나오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기획을 할 때 유사도서를 찾는 건 매우 중요하다. 타깃 독자가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로도, 구체적으로 어떤 책이 될지 기획안을 보고 쉽게 방향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 세 번째는 키워드를 유튜브로 잡아, 늘 뜻밖의 기획력을 보여주는 김유라 피디의 유튜브 채널 실용 가이드북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해가 바뀌고 2018년 1월의 어느 날, 김유라 피디와 첫 미팅을 했다. 출판사에서 어떤 아이템을 제안한들 저자가 쓸 수 없다면 소용이 없기에,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준비한 아이템들을 이야기했다. 김유라 피디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부터 가능한 범위를 확실히 했다. 애초에 유튜버를 꿈꾸고 영상을 제작하게 된 사람이 아니라 ‘하우 투 유투브’ 류의 책은 쓸 수 없다. 또 할머니가 청춘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류의 멘토가 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누군가에게 그런 책임 있는 말을 건네고 싶지 않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와 여행한 스토리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말에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여러 출판사의 제안을 많이 받아 왔으나 그간 채널을 운영하느라 바빠서 미뤄두고 거절해왔고, 독자에게 무엇이라도 남을 만한 책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에 선뜻 하겠다는 말을 못 했다고 했다. 책 출간의 무게감을 알고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이라서, 믿을 수 있었다. 그런 고민이 우리를 좋은 책이라는 결과물을 내도록 끝까지 이끌어주는 힘이 될 테니까.


회사 내 기획회의 통과를 위해 김유라 피디에게 샘플 원고를 요청했다. 2주∼3주 후에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차일피일 미뤄졌다. 워낙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고 있으니 무리일 거라 생각했지만, 연일 화제가 되고 쏟아지는 관심이 높아지고 있던 터라 조바심도 났다. 당시 박막례 할머니 채널의 구독자는 35만 명 정도였다. 책을 만들기로 미팅을 하던 중에 할머니는 40여 년간 운영해 온 식당 은퇴식을 했고, 유튜브로 제2의 인생을 살겠다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반찬 걱정 이제 끝이다!! 43년 식당 은퇴식〉). 또 한국 대표 유튜버로 초대를 받아 가게 된 구글 본사에서는 박막례 할머니가 얼굴도 모르는 유튜브 CEO 수잔을 찾아 헤맨 영상 〈Searching for Susan 수잔을 찾아서〉를 찍는 등 김유라 피디도 할머니와 함께할 유튜브 채널 ‘박막례 할머니 Korea Grandma’를 키우며 한 발씩 열심히 나아가던 시기였다.


샘플 원고를 기다리고 있다고 재촉만 하고 있던 중에, 8월 중순쯤 다이아 페스티벌이 열린다는 광고를 봤다. 거기에 박막례 할머니와 김유라 피디가 나온다고 했다. 당장 표를 끊었다. 뮤직 페스티벌처럼 주말 이틀간 고척돔에서 다이아TV(CJ ENM이 운영하는 유튜브 크리에이터 소속사) 소속 유튜버들이 총출동해서 팬들을 만난다고 했다. 유튜버라는 직업의 생태계를 잘 모르지만 그 스타들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궁금했다. 또 할머니의 편(박막례 할머니는 팬을 ‘편’이라고 부른다)들이 어떤 연령층의 어떤 사람들인지,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두 눈으로 보고 싶어 달려갔다.


무대 위에 나타난 할머니를 본 편들의 함성 소리. 할머니가 직접 준비해온 찐 옥수수를 받는 행운.


박막례 할머니와 김유라 피디가 잠옷 차림으로 무대 위에 나타난 그날, 같은 잠옷 차림(팬들은 미리 공지한 의상 코드로 맞춰 입었다)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1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했다. 관중의 뜨거운 반응 한가운데 앉아 있던 나는 책이 나오면 무조건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날 현장에서 할머니가 직접 나눠준 찐 옥수수도 받은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김유라 피디에게 인증샷을 보냈고, 진심이 통했는지 그다음 주에 바로 유라 피디와 만나 합정 카페에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그간의 활동을 바탕으로 가목차를 짜고 기획안을 썼다.

기획서라는 파일을 열고 칸을 채워 나갈 때 가장 깊게 고민하는 부분은 ‘차별점’이다. “우리는 왜 셀럽을 쫓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고정 독자를 확보할 수 있어서, 베스트셀러로 순조롭게 진입할 수 있어서, 라는 뻔한 대답밖에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 본다


지금 우리는 누구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가.

누구의 삶이 궁금한가.

우리는 누가 되고 싶은가.


가성비의 시대에 책값을 기꺼이 지불하고 읽을 만한 콘텐츠를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을 찾았다면 우리는 그의 책을 낼 수 있다. 이 시대의 독자들이 읽고 싶은 사람을 찾는 것, 나는 그것이 기획이라 배웠다. 저자가 살아온 시간 속에서 증명해낸 무언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책이 출간되어야 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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