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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멱 Aug 12. 2018

교토06. 도시 속의 황궁, 교토 고쇼

둘째 날

794년 간무천황이 종교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천도를 감행했다. 기존의 수도인 나라에서 천도한 도시의 이름은 헤이안. 지금의 교토로 천도한 이후 1868년에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행차하기 전까지 교토는 일본의 수도였다. ‘천년의 고도’라는 명성은 교토 시민들의 자부심이었다. 엄밀히 따져서 도쿄 천도가 천명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황은 도쿄의 이궁(도쿄 황궁)에서 머물 뿐, 정식 수도는 여전히 교토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천황의 거처이자 집무실이었던 교토 고쇼(어소)는 전통 일본의 정치 문화적 중심지로서 교토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고쇼가 헤이안 시대의 처음부터 황궁(다이다이리大內裏)이었던 것은 아니다. 교토 고쇼는 일종의 별장(사토다이리里內裏)이었다. 오닌의 난을 시작으로 센고쿠 시대(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화려했던 헤이안쿄는 무사들의 전쟁터가 된다. 도시를 전란으로 휩쓸고간 전쟁의 시대에 황궁도 속수무책이었다. 남조와 북조로 나뉘어 두 명의 천황을 두고 싸우던 1331년, 북조의 고곤천황 때 비로소 당시의 사토다이리가 고쇼로서 황궁으로 자리매김한다.


사찰의 도시, 전통 문화의 도시라는 별칭 때문일까. 정치 역사 중심지로서의 교토는 여행자들에게 낯선 이름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천황이란 존재가 역사 속에서 존재감이 없었던 탓일까. 교토 고쇼는 교토의 정체성을 상징함에도 한국 여행자들에게 크게 알려진 방문지가 아니다. 서울에 온다면 고궁을 여행해보는 것과 사뭇 다르다.

사카이마치고몬, 교토 고엔의 남쪽 문

교토 고쇼는 니조 성에서 걸어서 10~15분 거리에 있고, 교토 고엔(어원)이라는 거대한 공원으로 둘러쌓여 있다. 가뜩이나 교토에 고층 건물이 없거니와, 고엔으로 들어서면 울창한 숲에 둘러쌓여 바깥 도시로부터 확실하게 차단된다. 지도로만 보아도 거대한 도심 속 녹지는 천황이 거주했던 신성한 궁전을 세속으로부터 보호하는 거대한 자연 장벽처럼 보인다. 또는 천황을 그저 상징적 존재로서 현실 정치에서 배제하려 했던 무가 세력이 쳐둔 일종의 바리케이드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교토 고쇼는 고엔의 울창한 숲에 둘러쌓여있다.

군자대로행이라. 남문(사카이마치고몬)으로부터 정식 루트를 거쳐 궁전으로 향하는 것이 의미는 있겠으나, 10시 방향의 서쪽 문을 통해서 고쇼를 들어가는 것이 거리로는 가깝다. 군자대로행도 좋지만 뜨거운 태양 밑에서 그늘 하나 없는 대로를 걷기란 고행에 가깝다. 켄레이몬(건례문)이 고쇼의 남문으로 경복궁의 광화문에 해당하지만 개방하지 않아 서쪽의 세이쇼몬(청소문)으로 들어갔다. 켄레이몬에서부터 따라 걸은 고쇼의 담장은 단순하고 낮아보이지만 막상 다가서면 꽤나 높이감이 있다.

켄레이몬. 고쇼의 남문이자 정문이다
세이쇼문. 고쇼의 서문이다

고쇼는 원래 일본 궁내청 사이트에서 사전 예약을 해야 했지만, 지금은 복잡한 절차는 다 없어졌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황궁으로서 통제는 여전하다. 내부는 들여다 볼 수 없고, 북쪽 지역은 특정한 날짜를 제외하면 들어갈 수 없다. 그럼에도 주요 건축물과 정원은 대체로 모두 둘러볼 수 있다.

오쿠루마요세&쇼다이부노마. 사람들이 드나들던 입구와 대기하던 방이다.

교토의 필수 관광지도 아닐뿐더러,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또한 이미 천황이 떠난 교토 고쇼는 예상 외로 한적했다. 적어도 니조 성에 미치는 정도의 인파는 있을 거라 기대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방문 열기는 반가움인 동시에 어딘가 모를 쓸쓸함이었다.

신 미쿠루마요세&겟카몬. 다이쇼 천황 즉위식(1915) 때 만든 천황과 황후의 입구, 시신덴 안뜰(단테이)의 서문이다.

천황이란 존재가 내겐 그랬다. 철저히 외부인의 시선에서 그것은 답답함이었다. 새장 속의 파랑새. 드넓은 고엔으로 둘러 쌓인 고쇼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고쇼 자체가 교토 속의 파랑새이면서, 동시에 천황을 가두는 새장이었다.

시신덴. 고쇼의 정전이다. 중요한 국가의식이 열리는 건물이다. 아키히토 천황이 도쿄에서 즉위하기 전까지는 모두 이곳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자금성과 경복궁에 비교하자면 소박하기 그지 없다. 소박함이야 일본 문화의 정서려니,싶다가도 일본 각지의 거대한 천수각과 사찰 금당을 보고 있노라면 천황의 정전인 시신덴(자신전)은 한없이 초라해보인다. 닌나지의 금당(옛 시신덴)과 비교했을 때 현재의 시신덴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거대해졌다. 하얀 모래가 깔린 안뜰(단테이)은 정갈하게 정리돼 있고, 일본 황실을 뜻하는 귤나무(우콘)와 벚나무(사콘)는 황실의 엄숙함과 권위를 뽐낸다. 동시에 버려진 궁전의 빈 공간은 허무한 권력의 무상함으로 가득하다.

세이료덴. 헤이안 시대에 천황이 일상생활을 하던 건물이며, 이후에는 주로 의식이 거행될 때 사용했다. 현재의 건물은 처음 건물보다 크게 만든 건물이지만 헤이안 시대의 옛 구조에 의거하여 만들었다.
고고쇼&오이케니와 정원. 쇼군과 다이묘를 맞이하는 장소였다. 왕정복고의 칙명이 내려졌던 1867년의 ‘고고쇼 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도쿄로 행차한지 10여년이 지난 후 교토에 돌아온 메이지 천황이 그 사이에 폐허가 된 고쇼가 안타까워 특별히 제대로 가꾸도록 지시해서 지금에 이르렀다지만, 주인 없는 집의 적막함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으랴. 자금성이 화려하고, 경복궁이 수려하다면, 교토 고쇼는 고요하다. 흑백으로 점철되고 절제된 선으로 이루어진 황궁 양식에서 그러했을 뿐 아니라, 고쇼 전체를 감싸고 있는 적막함 또한 그러했다<>

오쓰네고텐&고나이테이 정원. 16세기 말에 세이료덴에서 독립하여 천황의 일상생활을 위해 사용된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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