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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블리 Jul 07. 2019

산책1

짧은 명동

   걷다 보면 충동적으로 다른 길로 가보고 싶을 때가 있다. 충동적인 삶과 일찌감치 거리를 두고 사는 나도 걸을 때만큼은 충동적으로 방향을 바꾸어보곤 한다. 그게 요즘 내가 누리는 작은 일탈이다. 차를 타고 가다 길을 바꾸려면 신호를 기다리고 그만큼 멀리 가서 돌아가야 하지만 걷는 것은 그저 발걸음의 방향만 바꾸면 된다. 그게 걷는 것의 특권이기도 하다. 그냥 걷다가 눈에 들어오는 골목길로 가보는 것, 그곳에서 때론 인생의 길을 만나기도 한다.


   왜 하필 가장 더운 오늘 이 언덕길을 선택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오랜만에 가보고 싶었다. 예전 신입사원 시절 퇴근길에 온갖 스트레스를 안고 여길 혼자 올라가곤 했었다. 그때의 계절은 가을 그리고 저녁, 어두웠던 하늘에 희미하게 존재감을 나타내는 한두 개의 별을 바라보며 이 언덕을 올랐다. 그렇게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날들이 모여 지금이 되었다. 난 어떻게 살고 있나? 그때 했던 고민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어느 정도 해결하고 성취하며 지금이 되었나 생각해보았다. 오늘은 스트레스는 없고 나만 있다. 몇 년 만인가?

 

   후덥지근한 날씨, 그새 많이 변해버린 이 길을 걷다 보니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보였다. 그들에게는 이 길이 처음이고 나에게는 오랜만이었다. 그 차이를 생각했다. 오랜만인 나는 예전 모습을 알기에 익숙함과 이질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느껴지는 그 감정은 묘한 것이어서 살아온 시간을 천천히 돌아보게 만들었다. 관광객들에게는 이 길이 처음이니 앞으로 살아가면서 한 번은 지금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결국 모든 장소는 과거에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대'라는 단어는 슬프다.

   명동역에서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아니, 있었던 ‘두부 레스토랑’ 오랜만에 찾았더니 문을 닫았다. 여기 어디쯤인데...라고 두리번거리던 나의 눈에  이 건물이 눈에 들어왔고 익숙함은 곧 이질감으로 바뀌었다. 한때 활발하게 영업했었던,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입구는 이제 굳게 닫혀 있었다. 하루하루 오늘과 내일의 간격을 유독 길게 느끼는 내가 누군가를 걱정한다는 건 사치라는 생각도 들지만 궁금했다. 손님이 많이 없었나? 장사가 잘 돼서 더 좋은 장소로 이사 간 건지 궁금하다. 굳이 찾아보진 않을 생각이다. 궁금한 것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


   이곳은 예전 내가 소개팅을 하거나 사귀었던 사람과 종종 찾았던 식당이라 작은 추억들이 남아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이 그때는 참 어려운 선택지였다. 뻔한(하지만 그만큼 기본은 하는) 체인점은 너무 성의 없는 거 같고 그렇다고 예약도 없이 만나서야 "어디 갈까요?" 물어보면 예의 없는 게 아닌가 싶었던 그 시절의 내가 적당한 분위기가 좋아서 자주 찾았던 식당이 이곳이었다. 가장 중요한 음식의 맛도 나쁘지 않았고 괜찮은 하우스 와인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게다가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프라이빗한 대화 공간이 어느 정도 보장돼서 좋았는데 괜히 아쉽다. 요즘 식당은 '소통'이 트렌드인지 자리마다 구분이 별로 없다. 마치 그 공간에서는 모든 것을 다 공유해야 한다는 듯이 옆 테이블과 내가 앉은 테이블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없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소개팅'이란 아무리 격의 없이 대해도 결국 모르는 사람을 처음 만나는 자리니만큼 '티'가 난다. 그 '티'를 열린 공간에서 만끽하고 싶진 않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라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자리는 어느 정도 독립된 공간이 있는 장소를 찾게 된다. 그래야 처음 만난 '나'와 '당신'의 이야기가 공간에 묻히지 않고 조금 더 서로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와 '당신'이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집중이 필요하다.


   이 식당은 그런 집중을 제공해주는 장소였는데 이제 남아있지 않다. 요즘은 소개팅이든 모임이든 대부분의 약속이 강남에서 잡히다 보니 이제 더 이상 명동에서 소개팅을 하지도, 이곳에서 밥을 먹을 일도 없지만 추억의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늘 아쉽다. 그리운 공간이 사라지면서 주는 공간에 대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곳이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하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다시 여기를 찾았을 때 이곳이 그 장소였음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해버리면 어떤 기분이 들까?   


   돌아갈 장소가 하나씩 사라지는 것 같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장소를 잃어간다는 의미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멀리 떠나온 만큼 나도, 장소도 변해간다. 나는 변하면서 장소는 그대로 남아있길 바라는 것도 욕심이겠지만 힘든 날에 기억 속에서라도 한두 번은 돌아가 보고 싶은 지점들이 있다. 그런 장소들이 사라지면 내 인생의 한때도 같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어 아쉽다.


   문득 그때 여기서 마주 앉아 있었던 친구들의 지금이 궁금해졌다. 그 시절 가장 아름답고 멋짐 모습으로 앉아 서로의 취향을 말하고 상대의 취향을 생각하고 호감을 가늠했건 '나'와 '당신'들의 지금 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어찌 보면 누군가는 알아가고 만난다는 것은 사막에서 정착할 수 있는 '오아시스'를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활짝 웃는 미소로만 남은 지금은 어딘가에 정착했을지 아니면 아직 정착할 곳을 찾아 헤매고 있을지 궁금하다. 이곳이 문을 닫았다는 것을 아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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